내가 곁에 있어도 외롭다고 말하는 그대여

 

1. 마음이 얼어붙어 입술이 튼다.

김애란의 이번 단편집을 읽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들었다. 책장 곳곳에 서려있는 외로움이 아프게 목 언저리를 눌러 와서 글자가 잘 읽히질 않았던 탓이다. 감정선이 묵직하게 잡히는 책들을 읽을 때면, 가끔 글자들이 그 무게들을 업고 달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 옷깃을 잡고 늘어지는 무게감 속에서 나는 늘 숨이 막힌다. 그래서인지 짧은 소설 8편의 글자가 지나치게 버거웠고, 나는 몇 번이고 글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다.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 마시다 내 뱉어도, 응어리가 틀어박힌 곳은 허파가 아니라는 듯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때맞춰 에픽하이는 새 노래를 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도 나는 춥다’고, ‘가슴에 구멍 나서 막아보려 해도 자꾸 바람이 샌다’는 노랫말이 김애란씨, 그녀가 뱉은 글자들과 아프게 얽힌다. 그래서일까, 비행운은 지독하게 건조하다. 건조하다 못해서 바삭거리며 가장자리부터 바스러져 사라지는 것만 같다. 물에 빠지고(「너의 여름은 어떠니」), 물에 잠겨 떠내려가고(「물 속 골리앗」), 비는 내리고(「큐티클」), 지구가 물러지고 묽어지는데다가(「하루의 축」), 더운 동남아 계절에(「호텔 니약 따」) 땀까지 쏟아져 내리는 걸 보면(「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큐티클」) 비행운에는 유독 젖고 습한 장면이 많다. 그럼에도 글이 촉촉하지 않다.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스스로의 발자국을 보려 뒤로 걸었다는 사내가 생각이 났다. 그 사내의 발가락 틈에서 흘러내렸을 모래알이 비행운의 글자 곳곳에 묻어있었다. 그렇게 보니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는 아득한 공백을 부각하는 것만 같아 목이 탔다. 채워지지 않을 기갈에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축여 보았다. ‘마음이 고장 나서 자꾸만 입술이 튼다’는 노랫말이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울렸다. 괜히 손끝이 버석하게 느껴져서 주먹을 쥐었다. 비행운 속에서 넘쳐흐르는 물, 그 틈바구니를 비틀어 열자 익숙하게 아픈 단어가 보인다. 외로움. 그리고 깊어진 외로움의 구덩이가 꾸역꾸역 몸피를 키우며 뱉어낸 ‘공허.’ 그 사이로 자꾸 ‘바람이 샌다.’

 

2. 내가 곁에 있어도 외롭다고 말하는 그대여

비행운의 여덟 단편 속 주인공들은 그들의 세계 속에서 항상 홀로 외로운 존재로 그려진다. 고독함이라는 바탕 위에, 저마다 다른 색깔로 그들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그러한 외로움은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형태는 하나같이 기이하고 비일상적이며 나아가서는 비정상적이기까지 하다. 「하루의 축」에서 기옥씨의 외로움은 혐오감을 심어줄 정도로 벗겨진 그녀의 머리다. 비행운(非幸運)의 나선 속을 빠르게 달리는 그녀의 머리 위는 상실의 공간이다. 상실, 무엇인가가 도려내진 자리에는 그만큼의 빈 공간이 남는다. 남편이 도려지고, 아들이 도려지고, 민족의 대 축제에 인간적인 온기마저 도려내진 머리 위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앉는다. 그렇게 비행운 속에는 곳곳에서 외로움과 불안의 상징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결핍이라는 단어와 아주 많이 닮았다. 「그곳의 밤 여기에 노래」에서는 죽어버린 아내와 비정상적으로 땀이 흐르는 용대의 손바닥이 그렇고,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과 장례식에 가다말고 기이한 복장으로 방송을 타게 되는 미영의 상황이 그러하다.

「큐티클」에서는 주인공이 돈을 주고 손끝의 온기를 산다. 잘 다듬어진 손끝은 그녀의 조촐한 욕망과, 그것이 은밀하게 감춘 외로움을 투사한다. 그녀는 태만하다고 욕했던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밟으면서까지 선배의 손에서 느꼈던 희열을 다른 이가 자신에게서 찾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낯선 타인이 자신의 손을 정성스레 다듬는 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보살펴 주길’바랐던 마음 깊은 곳의 열망을 불현 듯 깨닫는다. 그것은 인정의 욕구, 자아 충족에 대한 욕구이며, 달리말하자면 비행운의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물질적으로 그리 부족해 보이지 않는 그녀의 결핍이다.

나머지 다른 소설들에서도 결핍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핍들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그들의 존재를 주장하며 직시를 요구한다. 「호텔 니약 따」에서는 사람의 결핍이 진행된다. 할머니의 죽음에 더하여 오랜 기간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이별통보가 그녀를 찾아오고 그 모든 것은 자신과 대비되는 친구에 의해 여유의 결핍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결핍은 타국의 호텔에서 꿈이라는 방법으로 눈앞에 등장한다. 비슷하게 「벌레들」에서는 여자의 불안이 벌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협하는 불안과 공포에 대적해, 살충제 스프레이 버튼을 질끈 누른다. 「물 속 골리앗」에서는 안주할 공간의 부재가 연쇄적으로 터지는 상실의 시발점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키는’(p95) 물은 이러한 상실과 소외의 집약체가 되어, 투명한 봉지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형태를 만든다. 그래서 때로 소년과 그의 어미는 야밤에 일어나 그것을 가만히 마주하고, 외로움의 떫음에 감각이 마비된 채, 거기에 칼을 대어 난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절망의 절정에서, 소년의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의 상실, 그리고 소년의 고립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렇게 외로움과 상실, 소외와 불안은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형태를 가진 허상’으로 그들의 등에 찰싹 붙어 있다. 마치 발끝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그들의 외로움을 서로 나누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세계 속에서 비행운의 그것이 외로움인지도 모르고 혼자 살아간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 외로움의 증거를 드러내는 것은 터부시 된다. 기옥 씨의 상실의 상징, 외로움의 집결체는 두건 속에 갇힌 채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파르르 떨려온다.

하지만 기옥 씨가 그 얘길 꺼내기 전부터 파트장의 얼굴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기옥 씨는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천진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들의 편지를 읽은 뒤 정신이 멍해진 채 본인이 방금 벤치 위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한 까닭이었다. (중략) 파트장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했지만 동공만은 몹시 크게 벌어져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놀라운 게 아니라 무서운 걸 보기라도 한 듯. (「하루의 축」, p201)

비슷하게, 「그곳의 밤 여기에 노래」에서 용대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참, 당숙모는 잘 계시죠?” (p160)

도드라진 상처를 헤집는 조카의 한마디에, 그는 잠시간의 침묵 뒤 ‘그러엄.’이라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정말 삼촌다운 목소리로’ 상실의 외로움을 감춘다. 인자함 속에 파랗게 몸을 감춘 외로움의 조각이 빛마저 집어삼킬 듯 어둡게 반짝인다. 다른 모든 작품에서도 모든 결핍들은 끝내 이야기 하지 못하는 비밀로, 허망한 순응으로 덮여진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외롭다. 불현 듯 외롭다는 것은 혼자 있을 때 사무치는 감정이 아니라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택시, 하루 수백, 수천만이 오가는 공항, 모두가 모여 왁자지껄한 결혼식, 여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아파트, 전 국민을 향한 TV방송 등 소설 속 인물들이 서 있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번잡한 장소다. 그런데도 그들은 결핍과 상실의 외로움에 허덕인다.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데도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 그게 진짜 외로움이라면, 그녀의 글 속에서 나는 외로움이 서러움이 되어 추락하는 광경을 본 듯 했다. 페이스 북 뉴스피드에서 요상한 사진들과 가벼운 웃음소리를 비집고, 갈 곳을 잃은 듯 비틀대며 올라오는 외로움의 토로들. 많은 사람들의 공간 속에서 혼자 파르라니 외로움의 서늘한 냄새를 풍기던 그 독백들. 단편 끝자락의 먹먹함과, 그 얕은 한숨의 조각들의 뒷맛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돌아가는 길을 몰라. 그런 게 있었나 몰라.

그러나 비행운이라는 책이 단순히 개인의 외로움과 결핍만을 조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결핍의 상징들 아래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 역시 날카롭게 자리한다. 첫째로 비행운 속에는 적막이 깔려있다. 시끄러운 공항과 먼 이국의 여행지에서조차 그들을 에워싼 주변의 공기는 무섭도록 조용하다.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데, 그들 주변의 공기만 누군가가 한 움큼 덜어낸 것만 같다. 그들과 세상 사이에는 얇은 유리벽이 하나 놓여있다. 볼 수는 있으나 다가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차단막’은 그들과 세상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절은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세계로부터의 퇴출뿐만 아니라, 그들의 절박함과 치열함을 카무플라주하는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멀리 가림막 너머로 자동차 소음이 들려왔다. 그건 마치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질 나쁜 소문처럼 A구역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단지 장막 한 장이 드리워졌을 뿐인데, 그 소리가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중략) 멀리 보이는 장미빌라는, 모텔과 교회는, 아파트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나는 이 출산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p80-81) 「벌레들」

밤이 되면, 산 중턱에 덩그렇게 솟은 재개발 아파트의 윤곽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주위를 밝히고 있는 곳은 오직 하나, 우리 집밖에 없었다. (p89) 「물 속 골리앗」

 

그들은 모두 우리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택시기사, 공항 청소부, 평범한 회사원, 20살을 반추하는 30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신혼부부, 말간 얼굴의 어린 남학생. 그들은 아마 서로 접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큐티클」의 여자가 탄 택시가 용대가 운전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고, 「호텔 니약 따」의 두 친구는 기옥이 청소하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보던 TV 뉴스에서 「물 속 골리앗」의 소년이 지나가고, 미영이가 설움을 먹는 장면 역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이 작은 틀 안에서 서로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끌어안고, 극단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떠밀면서 모두가 소외되고 있었다. 문득,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김애란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당신 옆을 스쳐간 이 사람들의 이름을, 아시냐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한사람의 외로움이 여러 사람의 외로움과 만나서 불안이라는 이름을 띠고 공명한다. 그리고 끝까지 맞닿지 않을 외로운 선들의 교차점들이 얽혀들면서, 이 산문집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용대씨의 외로움 한줄, 기옥씨의 외로움 한줄, 서미영씨의 외로움 한줄, 줄들이 씨실 날실 얽히듯 만들어 내는 표면에는 우리 사회의 얼굴이 점점 떠오른다. 배배꼬인 외로운 줄이 만드는 면직은, 마찬가지로 일그러져 있었다.

중요한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들 스스로 벽을 세우지 않았다. 절벽의 끝에서 불안하게 서서 칼바람을 맞는 그들은 그래서 묻는다. ‘이 외로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소리만 자꾸 귓가를 에인다. 누가 그들을 떠밀었느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세상으로부터 벽을 세우기를 종용 당했고, 이내 그 끝자락으로 떠밀려갔다. 벽을 만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속한,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였다.

그들이 사회의 압박에 따라 모자를 쓰고, 거짓말을 하고, 네일 케어를 받으면서 그들의 결핍을 숨겨야 했듯이, 사회역시도 그들을 시야에서 차단한다. 그래서 우리사회 곳곳에 자리한 이들은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 번화가에서 삭막한 표정으로 한쪽 팔을 들어 올리는 바쁜 현대인에게 택시 기사가 중요한 의미가 아니고, 출국을 한 시간 앞둔 상기된 표정의 여행객들에게 청소부가 보이지 않듯이 비행운의 안에는 근대성의 폐해가 등장한다.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뒤에 자리한 혜화성곽으로 자주 산책을 갔었다. 성곽에 오르면 앞으로는 남산타워를 비롯한 서울 중심가, 종로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뒤쪽을 바라보면 성북동의 달동네가 다닥다닥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성북동의 어느 부분은 소위 말하는 ‘부촌’이다. 어느 기업 모 회장님의 집도 그곳에 있다고 하니. 밤이 되어서 어둠이 내려앉으면 이 외로운 성북동은 어둠에 잡아먹혀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산길을 따라 줄지어선 가로등만이 비출 뿐이다. 밤의 성곽에는 화려한 종로의 불빛만이 가득하고, 서울에 자리한 각종 전망대에서는 야경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국제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정부가 실시하는 노숙자 수용, 강남 어딘가에 높게 선 아파트 단지 뒤로 어렴풋이 비치는 허름한 회색 콘크리트 집들도 모두 이러한 근대성의 폐해다.

권력은 사회에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대상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아 격리하고 수용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비정상적인 결핍의 상징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차단당하고 소외되어간다. 더욱 우스운 사실은 예전에 그것이 단순히 신체적, 정신적 비정상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권력의 범위는 점점 좁아져가고 상대적으로 격리 대상의 범위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구성원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과 같은 형태와 같이 소외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생산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소외의 그림자는 이제 조용히 제 몸피를 키우고 우리 사회 전체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용대 씨는 자꾸 묻는다. 자신을 내모는 세상에 대고. 그의 죽은 아내가 그랬듯이.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리 쩌리 위안 마?”

“여기서 멉니까?” (p168) 「그곳의 밤 여기에 노래」

소제목은 아이유의 ‘길 잃은 강아지’라는 노래 가사다. 가사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젠 여기가 내 자리 같아.’

4. 점점 더 멀어져간다. 애타게 사라져 간다.

처음 이 책의 광고를 접했을 때, 거기에는 ‘서른을 위한 위로서’라는 글귀가 있었다. 가만 보면 비행운 속에서 주인공들은 서로 소소한 깨달음을 그리며 살아간다. 죽은 친구의 팔이 참으로 아팠겠다는 사실, 세상 어디의 누군가는 내가 그랬듯 나 때문에 아주 많이 아팠으리라는 사실을 느끼고(「너의 여름은 어떠니」), 말없이 맥주 한 캔을 비운 뒤 친구의 빈 가방을 들고 어둠을 가른다.(「큐티클」) 어지러운 다툼 뒤에 남은 일정은 왠지 모를 기대감을 갖게 하고 그들이 아직 어림을 역설하는 것만 같았다. (「호텔 니약 따」)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토로하고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서른」) 그들은 서른의 문턱을 넘는다. 그런 점들을 보면 절망 덩어리의 이 책이 왜 서른에게 위로서가 되는지 이해가 갔다.

그러나 스물의 눈으로 보면 이 책은 참으로 잔혹하다. 혼자만의 외로움을 짊어지고 스스로의 앞길을 걸어야 하는 어른. 지나온 20살의 젊음을 시기하고, 후회하고, 원망하고, 자책하면서 서른을 살아야 하는 「서른」과 「큐티클」, 「너의 여름은 어떠니」를 보면 모든 스무살들의 서른의 초상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서른」

뒤표지에 적힌 한마디가, 그녀들이, 또 김애란이 세상의 모든 어린 스무 살들에게 던지는 이야기 같아서 제법 매섭다. 온기를 돈으로 사게 되고,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다가 상처입고 너덜너덜해진 채로 스물을 그리는 서른의 우리들. 뭉그러져버린 부케, 소용없어진 캐리어. 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는, 그녀처럼 땀투성이이던 어느 아줌마, 그녀의 미래일 나의 미래.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서른의 위로서보다는 스물의 지침서라 불리 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부서지는 서른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애달파하는 스물이 어떠했기에 오늘날 그들이 서른이 이런 모습인가와 동시에, 나아가서는 이런 질문까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스물을 보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 비행운에는 결핍들이 가득하다. 「서른」의 수인 역시도 스무 살에 돈의 결핍을 겪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속한 사회는 결핍을 부정한다는 점에 있다. 요즘 대학생만 해도 그렇다. ‘완벽’한 스펙과 완벽한 학점, 완벽한 어학능력으로 무장한 이들만이 대우 받고 무언가 하나가 결핍된 사람은 모자란 취급을 받는다. 우리 사회에서 실패는 점점 더 무서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당연한 말로, 한 번의 실수로 낙오자의 낙인이 찍히는 사회 구조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정부는 우리나라는 청년 창업률이 지나치게 낮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러한 문제의 책임은 청년들이 아니라, 실패를 죄악으로 만든 사회에 있는 것이다. ‘실패는 다 경험이 된다’던 어른들의 말씀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결핍을 부정하는 사회는, 앞서 말했듯 결핍된 사람들을 밀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결핍을 없애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비행운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인은 그녀의 가난이라는 결핍을, 서윤은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결핍을 메우려 애쓴다. 소설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불안과 결핍을 메우기 위해 손톱을 칠하고, 물을 받고, 테이프를 재생시키며 추석까지 일을 한다. 그러나 결핍은 사실 더 큰 결핍을 낳을 뿐이다. 「큐티클」에서 여자는 자아실현에 대한 결핍, 인정에 대한 결핍을 메우려 네일아트를 받는다. 그녀의 손톱은 끝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난 것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수치인 겨드랑이 따위였다. 늘 딱 맞는 한 뼘이 없어서, 한 뼘 모자랄 바에야 한 뼘을 더 선택했던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 뼘 더 얹은’ 그녀의 네일아트 탓에 그녀는 더 큰 것을 잃었다. 그리고 이것은 부케와 덜그럭대는 캐리어와 맞물려 수치가 된다.

결혼식장에서는 누군가 알아주길 그렇게 바랐는데 이상하게 친구 앞에선 감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친구가 나를 비난할리 없고, 그쯤은 대단한 사치도 아닌데 그랬다. (p241) 「큐티클」

끝에서 이 부끄러운 상징은 맥주 캔 따개 사이에서 부질없이 찢어져 나간다. 찢겨진 손톱 밑에 은닉해 둔 외로움이 부끄러움을 업고 쏟아져 내린다. 그들이 결핍을 메우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결핍은 늘어만 가고 그에 비례해서 소외감 역시 짙어져 가는 악의 순환이 반복되어 진다.

그렇게 그들이 그 모든 ‘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서른이 되어 있다. 나의 결핍에 또 다른 이의 스무 살을 제물로 바쳤던 「서른」의 수인이처럼, 결핍에 쫓겨 살아가는 오늘날의 이십대들이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소제목의 이어지는 가사처럼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를 깨닫고, ‘내게는 천금 같았던 기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의 전반에서 이러한 결핍의 순환 고리가 모여 「하루의 축」에 나오는 대립화된 공항의 모습, 화장실에 스스로의 결핍을 흘리고 다니는 현대인, 「너의 여름이 어떠니」에서 삼촌을 따돌리려 거짓말을 하는 검사 조카를 만들어 낸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전 사회적으로 커다란 결핍의 구멍이 탄생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애란이 비행운을 통해 우리 사회를 향해 던지는 질문은 비단 서른의 문제가 아니라, 스물을 사는 우리들이 꼭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사회의 문제점이자, 서른을 만들어가는 스물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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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소제목들은 모두 노래 가사이다. ‘1. 마음이 고장 나서 입술이 튼다.’는 에픽하이의 ‘춥다’, ‘2. 내가 곁에 있어도 외롭다고 말하는 그대여’는 정확히 ‘내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고 말하는 그대여’라는 가사로 드라마 응답하라 1997 OST의 원곡인 오월의 ‘종로에서’, ‘3. 돌아가는 길을 몰라. 그런 게 있었나 몰라.’는 아이유의 ‘길 잃은 강아지’, ‘4.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애타게 사라져 간다’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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