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일명 ‘강경대 치사사건’이 터졌고, 군대에서 제대 하자마자 IMF가 닥쳤고, 참여연대에 돌아오자마자 대선을 겪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큰 사건은 언제나 그가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결코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언제나 꿋꿋이 맞서왔다. 늘 권력과 제도에 맞서 투쟁해왔다. 그가 살아있는 한, 투쟁은 계속된다.

수업 한 번 제대로
안 들었던 학창시절
그러나 후회는 없다
전공 대신 세상을 배웠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의 이름을 처음 발견한 곳은 바로 ‘사무실 청소 당번 명단’이었다. 정리가 안 된 사무실 앞에서 그는 “바빠서 사무실 청소를 거의 못 한다”며 멋쩍은 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면도할 시간도 없었는지 그의 얼굴엔 수염이 덥수룩했다. 종로경찰서에서 안진걸을 모르는 출입기자가 없을 정도로 경찰서도 바쁘게 드나들었던 그는 반값등록금을 비롯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안만 열 개가 훌쩍 넘는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뛰고 있는 그의 현재 모습과 달리, 그는 “대학에 막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다고 말한다.

학생회장 안진걸
학생의 소리를 듣다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한창 가난한 시절이었고, 대학 진학률도 높지 않았을 때였잖아요. 그때는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입학하는 게 도리였죠. 그래서 입시 준비를 해서 법학과에 입학했어요. 그 무렵이 한창 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 시절이었는데,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거죠.”


-그럼 언제부터 학생운동에 발을 들였나.
“대학에 오자마자 선배들이 보여준 게 85년 광주 학살 비디오 같은 것들이었어요. 처음엔 학생운동에 대해 잘 모르니까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에 운동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고 그랬죠. 그런데 한 달쯤 지나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때부터 매일같이 시위나 집회에 나가게 된 거죠.”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었던 건가.
“당시 학생운동 하는 학생들을 잡아들이는 경찰을 ‘백골단’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에게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라는 친구가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가 등록금이 15%씩 폭등하고 있을 때라 시위가 많이 일어났었죠. 그런데 어느 날 등록금 시위하다가 구속된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던 그 친구가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사건이 일어난 거에요. 그 사건이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국가권력은 국민을 보호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국가도 아니고 국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비판했는데 죽는구나. 이게 반복되지 않으려면 좋은 세상이 와야겠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고시공부보다 사회운동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가 4월 26일이었는데, 그 이후로 매일같이 학생운동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학생회도 하게 된 거예요.”


-법대 학생회장도 했고 총학생회 정책위원장도 했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던 걸로 알고 있다.
“별의별 일을 다 했죠.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과의 모토가 ‘생활학문 투쟁공동체’였어요. 일상에서 불편한 것들을 바꾸자는 거였어요. 저녁에 운동하는 학생들을 위해 ‘다목적 운동장 라이트 설치 캠페인’을 하기도 했고, 사물함 증설 운동을 하기도 했고, 정수기 설치 캠페인도 했어요. 지금 생긴 법학관도 다 제가 운동했을 때 이야기 했던 거에요. 그때 건축전문가들하고 돌아다니면서 ‘건물이 들어올 자리는 여기밖에 없다’며 건물을 새로 지어야한다고 이야기 했었죠.”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수업시간에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데.(웃음)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학점이 아주 안 좋아요. 2.0은 되나 모르겠어요. 그래서 공부 관련해서는 후배들에게 할 말이 없어요. 그래도 그때 전공공부 대신 세상공부, 사람공부, 사회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부모님은 마냥 고시공부만 할 줄 아셨을 텐데.
“제 위로 형이 있는데,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제게 절대 학생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죠. 한겨레신문을 보고 있으면 찢어버리면서 ‘제발 이 신문 보지 마라’하실 정도였어요. 너무 죄송했지만 굽히지 않았어요. 보람이나 재미도 느꼈지만, 진짜 지식이나 사실에 근접하려면 이런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참여연대 안진걸
시민의 소리를 듣다

 


그의 학생복지에 대한 관심은 졸업하기 몇 달 전, ‘참여연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참여연대에서 몇 년을 보낸 후, 인터넷 미디어 ‘코리아포커스’, ‘희망제작소’ 등을 거치며 관심을 사회복지 NGO(비정부기구)로 확대해간다. 하지만 현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로 돌아온다. 이후 5년째 참여연대에서 활동 중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참여연대 같은 단체들이 많이 바빠졌을 것 같다.
“대선 때부터 우려했어요. '경제대통령'을 표방하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오히려 경제가 후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나다를까, 일제고사 부활부터 4대강 사업, 수도민영화, 부자감세, 영어몰입교육 같은 문제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죠. 결정적인 것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에 건너가 이른바 ‘묻지마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일이었어요. 그때 얼마나 이슈가 됐는지, 고등학생들도 촛불을 들고 죄다 밖으로 나올 정도였죠.”


-무엇이 시민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문에 학생들이 일어났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정책을 국민적 동의하에 추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밀어붙이니까 직접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다들 느꼈던 거죠. 87년 6월 항쟁보다도 규모가 컸어요. 5월 청계광장에서 시작해서 8월까지 백일 정도 연일 수백만 명이 참여하고 또 수백만 명이 생중계로 지켜본 항쟁이었어요.”


-당시 경찰에 구속되지 않았나.
“당시만 해도 야간집회가 금지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낮에 집회를 할 수 없잖아요. 직장인들은 직장에 가야 하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위헌 소송을 냈는데, 판결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촛불시위가 길어지고 정권에 위협이 되니까 처음엔 그냥 지켜보던 정권도 강경모드로 나왔죠. 하지만 저는 구속되지 않았어요. 야간집회금지 조항이 위헌법률심판 제청되면서 2달만에 보석으로 나왔죠. 승소도 했지만, 그때까지 나오지 못한 다른 촛불 구속자들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았어요. 게다가 판결 후에 ‘야간집회가 허용 된다면 밤마다 서울시민의 폭도들이 난리를 피울 거다’는 괴담이 떠돌았어요. 그런데 구속자들도 다 풀려나고 촛불 문화도 자리 잡힌 지금에 와서 보면, 평화롭게 잘 되고 있잖아요.  이젠 숭고한 뜻을 새기며 합리적으로 주장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해요.”
그가 가장 집중적으로 주장했던 사안은 ‘반값등록금’이었다. 그는 ‘등록금넷’을 발족하고 1인 시위에도 나서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등록금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담론화되지 않던 때, 등록금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렸다.
“요즘 등록금 문제가 가장 심각하죠. 옛날에도 비싸긴 했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어요. 옛날에는 과외를 열심히 하면 등록금을 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과외해서 받는 비용은 그대로인데 등록금만 잔뜩 올랐어요. 게다가 스펙 때문에 어학연수도 가야 하니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일도 있을 정도죠. 어느 나라나 고등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요. 그 나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시장에 맡기지는 않는 거에요. 최소한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등록금넷’을 발족하게 됐어요.”


-반값등록금 논의를 거의 처음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당시 한나라당 공약이 반값등록금이었어요. 그래서 ‘보수 여당서도 하는데 잘하면 되겠다, 공약이니까 정책 이행을 요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자꾸 말이 바뀌는 탓에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교수들과 학생들이랑 힘을 합쳤죠. 릴레이 시위도 하고 강연회도 열고 캠페인도 했어요.”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집권 세력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모두 멈추고 뭐가 잘못인지 분석해보는 과정이 필요해요. 청소년 죽음 1위가 자살이에요. 죽는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닌 자살이라면,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거거든요. 대학에 간다고 모두 행복해지지는 않잖아요. 서울대생들의 자살률이 높은 거 알아요? 높은 성취감 뒤에 높은 자살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나 자기실현의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에는 그런 게 없어요. 구체적으로 등록금 문제를 하결하려면, 고등교육예산을 oecd 평균수준으로 증액하면 반값등록금 예산이충분히 보장되므로, 그 예산으로 바로 반값등록금을 지원하면 됩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우리나라의 상황을 종합하면 반값등록금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의지의 문제이므로 정부여당이 맘만 먹는다면 바로 가능한 것이죠.”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나.
“작은권리찾기 운동본부라는 게 있었어요. 묵살되고 있는 시민의 작은 권리를 지켜주자는 거죠. 대중교통이나 도로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하는 소송도 하고, 이동통신요금 원가공개소송도 했어요. 그 외에도 친환경 무상급식 캠페인, 비리재단 복귀 저지, 전세대란 대응, 중소상인 살리기 운동 같은 것들을 했죠.”


-시민운동을 ‘빨갱이’라고 매도하기도 하지 않나.
“물론 모두의 지지를 받지는 못하죠. 그래도 많은 지지를 받는 사안들은 분명히 있어요. 진짜 필요한 것들을 주장하면 참여는 하지 않는 사람들도 박수는 보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대체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운동들을 하고 있어요.”
-이른바 ‘부’와는 거리가 있는 활동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신조가 있다면.
“제가 가진 이론이라고는 휴머니즘밖에 없어요. 잘 살지는 않아도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 방법을 찾아가는 게 요즘 유행하는 말로 ‘경제민주화’일 수도 있고 ‘사회민주화’일 수도 있고, 추상적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사람 사는 세상’일수도 있고 촛불 시위 때 구호였던 ‘함께 사는 대한민국’일 수도 있죠. 저는 그걸 관통하는 신조가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더 구체적으로는 생명과 평화가 최우선으로 존중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세상을 꿈꾸나.
“모두가 이건희처럼 다 잘 살 필요는 없어요. 그건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최소한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되죠. 꼭 참여연대가 아니어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좋은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혹시라도 빈민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실패했을 때도, 좌절하는 게 아니라 복지의 따뜻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 청년들과 같이 고민하고, 내 일처럼 함께 투쟁도 하고 제안도 하면서 청년세대가 우리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게 제 꿈이에요. 더 많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 중앙대는 한창 총학생회 선거철이다. 후보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선거는 지나치게 ‘운동권·비권’으로 프레임이 갈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운동권·비권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비권이어도 반값등록금을 주장할 수 있고 재단의 모순을 비판할 수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순이나 고통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느냐죠. 제대로 말할 수 있으면 비권이어도 좋은 거고, 말할 수 없으면 운동권이어도 안 좋은 거죠. 물론 기존의 운동권이 학생대중과 소통에 실망하고 자신들만의 노선투쟁으로 학생들을 실망시킨 면이 크지만 그건 기존 학생운동에 대한 성찰로 재기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운동권이든 비권이든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게 선의의 경쟁을 했으면 좋겠어요.”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란?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를 만든다

나뭇가지 하나는 부러뜨리기 쉽지만 나뭇가지들이 모이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는 시민 하나하나의 작은 힘을 모아 혼자서는 상대하기 힘든 국가나 기업 등을 감시하고 빼앗긴 시민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있다. 그동안 사소하다고 치부해왔던 작은 권리들을 되찾아주고 있는 것이다.
1997년 사소한 권리의 실현이 사회 변화의 시작이라고 여긴 참여연대는 <작은권리찾기 운동본부>를 만들어 집단 손해배상소송과 통신요금 인하운동, 개인정보 보호운동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작은권리찾기 운동본부는 2007년, 현재의 민생희망본부로 다시 태어난다. 새롭게 태어난 민생희망본부는 3대 가계부담 줄이기 운동과 등록금인하 운동, 식품 안전 운동 등을 시작했다. 사교육비, 대학 등록금 부담을 완화시키고 서민들의 내집마련과 의료의 보편적 복지를 위해 힘쓰고 있기도 하다. 이 정도면,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편들을 모두 다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2008년 참여연대는 반값등록금의 현실화를 위해 500개가 넘는 시민단체와 ‘등록금넷’을 결성해 등록금 동결 혹은 인하라는 성과를 얻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를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을 하고 있는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는 작은 목소리도 모이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김순영기자


당신에게
중앙대란?

“지금 하는 활동들의 원동력이에요. 입학했던 91년부터 졸업을 한 98년까지, 방위로 근무하던 군 시절까지도 학교를 수시로 들락날락 했어요. 지난 것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많이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과, 학생회에서 배운 것, 따뜻하고 소박한 공동체가 제게 많은 영향을 끼쳤거든요. 저에겐 가장 소중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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