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 한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냥 궁금해할 뿐이다. 물론 몇 마디를 나누어 본다면 일말의 궁금증이라도 해소가 되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박사를 마칠 때까지 30여년을 학생으로 살았고, 현재 학생을 가르치며, 한 학생의 아버지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학생들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복층주택으로 길가와 인접한 2층을 서재로 사용하고 있다. 서재에 앉아있을 때 주변에 중·고등학교가 많아서인지 학생들이 집 앞에 모여 잡담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우리도 그때는 그랬지 하며 이해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말들이 듣기에는 온당치 못한 표현으로 채워져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넘어가면 학생이라는 직업은 연장되지만 자신만의 학문세계와 사고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통해 더 큰 성장을 하게 된다. 나 역시 대학에 들어온 이후 나의 미래역할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느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역시 대학에 입학한 이후 많은 것이 달라지고 성장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사람의 뜻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그 사람의 성장의 깊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즉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내가 쓰는 말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언어표현은 나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대학생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서울·안성을 오가며 강의를 하는데 그 때마다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알게 모르게 듣게 된다. 실망스럽게도 중·고등학생들에게서 듣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자신이 무심코 말하고 있는 것을 통해 자신이 판단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등교할 때 거울을 볼 것이다. 이는 거울속의 자기를 확인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려는 자세일 게다. 하지만 겉모습에는 신경을 쓰면서 마음이 보여지는 것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나 역시 친구들을 만나면 친근한 마음에 예전에 사용했던 거친 표현들을 하곤 한다. 다만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이중적인 행태라 보는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가 나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이라고 할 때 어느 정도의 이중성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중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나은 외적인 모습을 가꾸는 것처럼 내면의 모습을 가꾸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이전 단계의 학생모습에서 더 발전해 외면과 내면의 성장을 함께 추구하는 모습을 갖추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서원석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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