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진민섭 기자
  • 승인 2012.10.13 22: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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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준 영어영문학과 교수 “언어에 우열은 없다   모든 언어는 아름답다”

강원도 산골소년의
험난했던 학창시절


장영준 영어영문학과 교수(49)를 마주하면 어디선가 구수한 향기가 풍긴다. 하버드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면 어디선가 ‘버터 냄새’가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숨길 수 없는 친근한 냄새에 대한 궁금증은 ‘고향’을 묻는 질문에 바로 풀려 버렸다.
-고향이 어딘가?
“강원도 홍천이요.(웃음) 옥수수밭밖에 없던 동네에서 자랐어요. 항상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랬던 게 영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너무 답답해서 항상 ‘이곳을 벗어나면 어떤 곳이 있을까’하고 생각했거든요.”
-영어를 쉽게 접할만한 환경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동네에 중학생이 단 두명밖에 없었어요. 부모님도 농사를 지으셨던 분들이라 교육에 크게 신경을 쓸 수 있었던 가정환경도 아니었고요. 유일한 창구가 중학생 형들이었어요. 어느 날 형들이 저를 불러놓고선 학교에서 배운 영어라는 것에 대해 말해줬어요. 들어보니까 생전 처음 보는 언어가 너무 신기했던 거죠. 그때부터 무작정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나.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하던 편이었어요. 그래서 춘천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삐딱선’을 타게 되죠.(웃음) 중학교 때 매번 칭찬을 받다가 고등학교에 가니 성적이 계속 떨어지는 거에요. 그전까진 장학금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었는데 말이죠. 제가 고교평준화 첫 세대인데 당시 다니던 학교가 좋은 학교도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성적이 너무 안 나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그래서 고등학교 때 자퇴를 한 건가.
“성적이 우르르 떨어지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던 거죠. 선생님들은 다들 ‘그래도 그 정도면 잘하는 거다’라고 위로하셨는데 그런 것도 다 저를 비웃는 것 같았어요. 자퇴를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건 아니에요. 해도 해도 안 되니, ‘한달만 더 해보자’하며 죽도록 했는데, 그래도 떨어지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부모님 몰래 서울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죠.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자퇴와 동시에 가출했다는 의미인가?
“장문의 편지를 썼어요. ‘어머니 저는 00이라는 도시로 갈 테니 찾지 마시고 만약에 저를 찾으시면 또 다른 도시로 갈 거니까 절대 찾지 마세요’라고요. 자퇴하면서 집도 함께 나간 거죠.”
-서울에선 어떻게 생활했나.
“서울에 처음 왔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돈도 없고.(웃음) 돈 없이도 하룻밤 잘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해보니, 파출소 밖에 없더라고요. 처음에 ‘강원도에서 자수성가하기 위해 상경했습니다. 하루만 재워주십쇼’하니 다들 ‘저놈 뭐야?’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라고요. 그런데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게 마침 사환(경찰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직책) 자리가 비어 있어서 일하게 됐죠. 낮엔 파출소에서 일하고, 밤엔 학원에 다녔어요.”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봐야 하고, 대입준비도 해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3월에 가출을 해서, 7월에 검정고시를 봤고 11월에 학력고사를 봤어요. 시간이 너무 없어서 8월부터는 누워서 잔 적이 없을 정도였어요. 누워서 자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까봐요. 그렇게 3달을 공부하고 시험을 본 다음에 잠이 들었는데, 깨보니 3일이 지나있더라고요.(웃음)”
-고려대에 합격하지 않았나. 어떻게 단기간에 그런 성적을 냈나.
“제가 대학 갈 때 340점 만점에 180점을 맞으면 서울대에 갈 정도로 학력고사가 엄청나게 어렵게 나왔어요. 특히 수학이 어려웠는데, 저는 운이 좋았어요. 원래 수학을 못 했는데, 너무 문제가 어렵다 보니까 풀었으면 틀릴 문제들을 다 찍어서 맞춘 거에요.(웃음) 어릴 적 꿈대로 영어영문학과에 갔죠.”
-영어만은 자신 있었을 것 같다.
“막상 대학교에 가니 문장 해석이 안 되는거에요. 사실 영어를 어떻게 하는 건지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요. 1학년 때 교양영어를 수강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알겠다가도 집에 가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더 이상 물어보기도 창피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교재를 다 외웠어요.(웃음) 번역판이 두종류가 있는데 어떤 걸 물어볼지 모르니 두개 다 외웠어요. 결국 백점을 맞았죠. 백점은 200명 중에 단 2명이었어요.”
-외우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나.
“그래서 영문학은 포기했어요. 문학 수업은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교수님들도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고, 처음 듣는 단어들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때 생각했죠. 영어도 좋고, 문학도 좋지만 영문학을 업으로 삼을 수는 없겠다고요.”
-영어 이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 없나.
“사실 사법고시 준비도 해보고 외무고시 준비도 해봤어요. 그런데 고시는 영 적성에 안 맞았고, 회사는 더 싫었고요. 사실 언어학이 너무 좋아서라기보다는 적성에 안 맞는 것들을 가지치기하다 보니까 남는 게 대학원밖에 없더라고요.(웃음)”

 

바깥 세계를 꿈꾸던 청년,
하버드로 날아가다.


그는 다니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거쳐, 92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하버드로 향한다.
-유학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학사와 석사과정을 같은 대학에서 하다 보니까 같은 걸 되풀이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던 중 주변 친구들은 다 유학을 간다는 거에요. 창피한 이야긴데, 친구들이 다들 가니까 너무 질투가 나는 거에요. 그래서 무작정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했죠.(웃음)”
-‘질투 나서’ 유학을 결심한 곳이 하버드라니.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데, 주변의 친구들은 유학 준비를 유학원에 다 맡기는 거에요. 그런데 저는 힘들게 번 돈을 그냥 유학원에 갖다 바치긴 아깝더라고요. 진짜 가고 싶은 대학이 아니라면 차라리 배추장사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직접 대학에 원서를 냈어요. 그게 하버드고요.”
-하버드에는 어떻게 합격할 수 있었나.
“미국 대학은 추천서가 굉장히 중요해요. 하버드 언어학과 교수가 알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니 연세대에 그런 교수가 있다는 거에요. 저는 그 교수님을 전혀 몰랐는데, 알음알음 하다 보니 제 지도교수님과 같이 스터디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교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커피도 타고, 인사도 드리고 이야기하는 것도 듣고 그랬어요. 결국 연세대 교수님께서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과장해서 써주신 건 아니고, ‘나는 이 학생을 잘 모르고 스터디할 때만 봤다’ 이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게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 같아요. 물론 하버드 교수님들의 논문 스타일 등을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죠.”
-하버드의 첫인상은 어땠나.
“즐거움? 그곳에서 처음으로 학문의 즐거움을 느꼈어요. 3시간 꽉 채운 수업이었는데도 어느새 시계를 보면 수업이 끝나있어요. 잘 짜인 한편의 드라마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아요. 눈 감으면 강의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혼자 돌아와서 ‘어쩜 저렇게 멋있게 강의를 할까? 언젠간 나도 그런 강의를 할 수 있을까?’하고 감탄했죠.”
-한국에서 수업을 들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에서는 대학원생인데도 불구하고 ‘고딩’ 취급을 해요. 완전 생 기초를 가르쳐 주는데도, 숙제를 꼭 내주고 검사를 빼먹는 법이 없어요. 틀리면 빨간 줄로 쳐주면서 하나하나 지적을 해주고요. 또 한국에서는 ‘What is this?’라면, 미국에서는 ‘Why do you need this’였어요. 예를 들면 한국에선 피타고라스 정리의 공식을 외우라고 한 후에, 문제를 푸는 방법을 익히게 하잖아요. 하지만 미국은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것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아요. 피타고라스를 이용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를 던져주죠. 공식 이야기는 전혀 안 한 채 문제를 풀어보게 해요. 그러다 보면 피타고라스보다 나은 원리를 알아내는 학생들도 나오는 거죠.”
-힘든 점은 없었나.
“저는 하버드에 갔던 92년도에 처음 비행기를 타봤어요. 영문과를 나왔지만 막상 미국에 가니까 영어도 제대로 안 되고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죠. 교수님들은 제가 무슨 말할 때마다 ‘What?’ 이러시고.(웃음)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일년쯤 지나니까 꿈도 영어로 꿔지는 거에요. 점차 적응해서 2학년 때는 당시 동기들 중에서 처음으로 외부 학회의 지원금을 따냈어요. 그때부터는 미국 학생들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웃음)”
-미국은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하지 않나.
“학비 자체는 생각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하지는 않았어요. 환율 800원이던 시절에 학기당 18,000달러 였으니까 약 1,500만원정도였죠. 지금은 40,000달러 정도씩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여의치 않아서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기는 하지만 그걸로 부족하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했나.
“돈이 너무 없어서 친구들에게라도 빌릴까 했는데, 착하면 무능하고 유능하면 내 친구가 아니더라고요.(웃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죠. 신기하게 답장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일단 답장이 얇아서 실망했어요. 두꺼워야지 뭔가 들어있을 텐데.(웃음) 실망하면서 열어봤는데, ‘우리도 돈이 없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에서 장학금을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지금이야 인터넷 사이트로 다 알아볼 수 있지만, 그때만해도 이런 걸 아는 방법이 거의 없었거든요. 아마 제가 거의 첫 장학생이었을 거에요.”
-‘촘스키의 제자’라는 수식어로 유명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제자라고 할 정도면 지도교수님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촘스키 교수님은 지도교수님까지는 아니고 제 논문 심사위원이었어요. 물론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지도를 받았으니 스승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수식어는 조금 부담스러워요.”
-촘스키와 연락하려면 장영준 교수를 만나면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결해달라고 전화가 많이 와요. 몇 번 인터뷰도 연결해주고 그러긴 했지만, 지도교수까지는 아니었죠.”

 

영어와 한국어를
넘나드는 언어학자


-중앙대에 부임한 지 올해 15년 째다. 여전히 인기가 많은데, 본인 강의는 어떤 수업이라고 생각하나.
“철저히 준비해서 강의 교안과 PPT대로 강의를 하는 교수가 있고, 즉흥강의에 강한 교수가 있어요. 저는 후자인 것 같아요. 농담 같은 것도 미리 준비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많은데, 그러지는 않고요.(웃음) 농담은 준비할 수가 없죠. 상황에 맞는 유머가 있는 거니까요.
-그 유머가 썰렁하다는 의견이 많다.(웃음)
“썰렁하다고 하던가요? 아무래도 언어학을 공부하다보니까 언어 자체가 재밌어요. 주로 언어유희 개그를 많이 하죠. ‘중앙대에는 언덕이 많잖아. 그런데 언덕(frozen duck)은 먹으면 안돼. 녹여 먹어야 돼….’(웃음) 이런 게 다 직업병인 것 같아요.”
-자타가 공인하는 영어전문가다. 집에서 자녀들의 영어교육은 어떻게 하는 지 궁금하다.
“사실 저도 ‘기러기’아빠에요. 기러기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애가 미친 듯이 매일 게임만 하니까 한국에선 희망이 없겠다 싶어서 보냈죠.”
-교육자가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데, 안 좋은 시선도 있지 않을까.
“참교육학부모연대 같은 곳에서 불러서 가면, 저를 공격하더라고요. 당신들이 영어교육을 제대로 못 한다고요. ‘너희들은 미국에 애들 유학 보내고 영어교육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또 ‘강남 좌파’들도 이런 공격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개인적인 일과 영어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슈에 관해서 토론을 할 때 너도 미국에 애들 보냈느냐고 말하는 것은 인신공격이지 제대로 된 토론방법이 아니거든요. 토론회 끝나고 나서 ‘기러기라면서요?’라고 비난을 하는데, 기분이 안 좋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하는데엔 한계가 있지 않나.
“물론 영어를 잘하려면 미국에서 크는 게 좋겠죠. 영어 유치원이 좋겠죠. 하지만 되게 조심스러운 부분이에요. 한국에서 공부하고 뒤늦게 시작한다고 해서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거죠. 저도 영어를 중학교 때 처음 배웠는데 미국에서 박사까지 땄잖아요.”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영어교육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선 ‘우리 애가 남들보다 앞서 가야해!’라며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왜 영어를 공부하는지 생각해봐야 해요. 영어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미국에 있는 택시기사들을 영어 잘한다고 교수로 모셔오지는 않잖아요. 영어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요즘 대학생 대부분이 영어고민을 참 많이 한다.
“한 언어를 배우는데 4,000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런데 대학생들이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을까요? 일주일에 어학원 2~3시간 가서 언제 4,000시간이 되겠어요. 하지만 무조건 유학을 가야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인터넷으로 못 하는 게 없는 시대잖아요. 환경을 탓할 게 아니라 ‘4,000시간을 3년 내로 투자해보자’ 이런 의지가 있어야하죠.
-영문과 교수지만, 한국어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양주동 선생도 영문과 교수였죠. 영문과 출신이지만 서동요를 해석한 국어학자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언어학에 영어학, 한국어학 다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학문의 종착지는 다 같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연구를 더 하고 싶은가.
“세상을 떠난 후에 ‘한국어 학자’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모국어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 같아요.”


 

비너스와 사랑에 빠진 언어학자

▲ 장영준 교수의 연구실에 있는 비너스상

장영준 교수의 연구실은 여느 교수들의 공간과 같이 책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다른 교수들의 방에서는 찾기 힘든 물건이 눈에 띈다. 바로 비너스 조각상이다. 그러고 보니 벽은 그림이 차지하고 있고 책꽂이엔 유화들이 책 사이사이 숨어있다. 고흐나 피카소 같은 미술가들의 서적은 언어학자의 연구실인지 미술가의 연구실인지 착각하게 한다.
-비너스 조각상이 눈에 띈다.
“보통의 교수 연구실엔 이런 게 없죠. 사람 얼굴 그리는 연습을 하기 위해 산거에요. 각이 있어서 빛을 받는 면에 따라 색이 달라지거든요. 저건 4가지색이면 될 것 같아요. 실력이 늘면 면이 더 잘게 들어가 있는 조각상을 사야죠. 그렇게 면이 점점 잘게 들어가면 부드러운 곡선이 되는 거죠.”
-언제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졌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어요.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그림을 그렸죠. 학창시절엔 수학시간에 거울을 보며 스스로 얼굴을 스케치하기도 했고요.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죠.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형편이 좋지는 않아서 화가가 될 순 없었어요. 지금도 대학교에 가면 꼭 미대에 들러서 둘러 봐요. 중앙대에도 미대가 있어서 참 좋았고요.”
-아이들을 모델로 한 그림이 많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거든요. 아이는 다 귀엽지만 남의 아이를 그리는 건 실례가 될 것 같고. 그래서 우리 아들들을 많이 그리게 됐어요. 처녀작도 아들을 그린 유화였고요. 지금은 아들이 커서 엄마를 그려주고 있죠.(웃음)”
-아이들 그림만큼 누드화도 많이 그린다. 이유가 있나.
“누드화를 그리면 비례감각을 빨리 배울 수 있어요. 사람을 그릴 때는 조금만 실수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많이 나죠. 반면에 꽃은 작아서 잘못 그려도 실수한 것을 알기 어렵죠. 또 정물화나 풍경화는 구도만 익히면 그릴 수 있는데 인체는 고려해야할 부분이 많아요. 뼈와 뼈가 붙은 부분에선 피부 속에 숨겨져 있는 연골의 모양을 생각하면서 그려야하기 때문이죠.”
-가장 좋아하는 화가나 작품이 있나.
“‘고씨’ 미술가들을 좋아해요.(웃음) 고흐나 고갱. 클림트도 좋아하고. 러시아 표현주의 작가인 말레비치의 작품은 색감이 강렬해서 좋아요. 솔직히 안 좋아하는 미술가도 없고 안 좋은 그림도 없는 것 같아요. 에곤 쉴레의 작품을 보면 ‘우웩, 역겹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것도 이유와 의미가 있더라고요.”
-미술을 즐기는 데 필요한 것이 있나.
“미술은 알고 봐야 재미가 있어요. 변기가 미술관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상하죠? 사실은 조셉 보이스라는 작가가 ‘예술이 뭐냐’라는 질문을 던진 개념미술 작품이었어요. 같은 소재를 담은 그림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해요.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밀가루 반죽하고 있는 중년 여성의 벽화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알고 보면 노동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요. 모르고 보면 단순한 아줌마 그림일 뿐이고요. 추상화를 보고 재미를 못 느끼는 것도 어떻게 봐야할지 몰라서 그래요.”

 

어떤 일을 할 때 예상했던 결과와 너무 다르더라도, 나의 무능력으로 보지 마세요. 그저 준비가 덜 된 거라고 생각하세요. 많은 사람들은 한번 해보고 결과가 안 좋으면 ‘내가 능력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죠. 그러나 사람이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누가 강원도 산골소년이 교수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어요."

 

장영준 교수가 직접 그린 아이들 모습. <규민이와 태민이>, 2009.

당신에게
중앙대란?

“대학의 생명이 뭘까? 자유와 진리탐구다. 교수들은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서 연구를 한다. 그런점에서 중앙대는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경쟁체제가 생겨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젊은 지성들과 늘 대화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줬다는 점에서 항상 고마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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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15-12-03 21:25:01
지금 중앙대에 안계신 것 같은데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