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훈

용산 아이파크몰 양창훈 대표(54)는 뼛속까지 유통의 피가 흐르는 유통전문가다. 시작은 군시절 우연히 병참장교가 됐을 때였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하나부터 열까지 납품 기록을 손으로 작성하고 군용품들을 배급하며 유통의 첫맛을 느꼈다. 그 첫맛이 너무 달콤했던 걸까? 이후의 삶은 줄곧 유통인생이다. 대표이사의 자리에 오른 지금까지도 그의 책상에는 유통에 관련된 책이 쌓여있다. 아이파크몰을 이끌며 대한민국 유통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그가 다음엔 어떤 혁신을 가져올지 기대된다.

“현대백화점 입사하니 발령받은 곳이 슈퍼마켓
그 곳에서 생선 손질까지 배웠다.”

용산 아이파크몰 양창훈 대표의 첫인상은 ‘백발의 신사’다. 170cm 정도의 다부진 체격에 선한 인상까지 갖춰 모진 일이라곤 안 해봤을 것 같다. 이 정도면 ‘유통계의 황태자’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순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의 손은 거칠다. 횟집에 가서도 회보다는 고춧가루 팍팍 넣은 매운탕을 좋아한다는 소박한 입맛을 가진 것도 의외다. 험한 일 한번 당해보지 않고 곱게 자랐을 것만 같았던 이 남자, 알고 보니 “속칭 노가다 판도 뛰어 봤다”고 말한다.

-처음 일했던 곳이 ‘노가다 판’이었다니?
“백화점 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로 금강산업개발(現 현대백화점)에 입사했다. 그런데 발령받은 곳을 보니 백화점 부서가 아니라 금강슈퍼마켓이었다. 그곳에서 속칭 ‘노가다’를 뛰었다. 당시 금강개발산업은 식자재를 납품하는 영세한 계열사였지만 백화점을 새로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그 시절은 회사에서 대학생들을 모셔가던 시절이지 않나. 더 좋은 회사로 갈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 대학생들이 들으면 부러워할 이야긴데.(웃음) 5개 회사에 붙었었다. 증권회사와 은행도 있었고 두산에도 붙었지만 당시에는 현대가 가장 큰 회사였기 때문에 현대에 갔다. 처음 입사하면 어느 계열사에 가고 싶은지 3지망까지 적어서 내는데, 당시 입사 동기들은 대부분 1지망에 현대자동차, 2지망에 현대건설, 3지망은 현대중공업을 써서 냈다. 그런데 나는 백화점 유통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금강개발산업을 1지망으로 썼다. 당시 그룹 내에서 1지망으로 금강개발을 적어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름 촉망받는 신입사원이라 생각했는데, 발령 받고 나니 슈퍼를 가라는 게 아닌가.(웃음)”

-진짜 ‘노가다’를 했다는 건가.
“슈퍼에서 근무하는 데 전략이 필요하겠나. 그냥 박스를 나르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배달까지 했다. 한창 더운 한여름에 차도 없이 자전거로 낑낑대며 배달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땀이 한바가지 쏟아졌다. 더 힘들었던 건 강남 아줌마들이었다. 슈퍼가 압구정에 있었는데, 아파트에 사는 사모님들은 배달 오면 쳐다도 안 본다. 고개로 휙휙 하며 ‘거기 놓고 가’라는 신호를 보내는데, 그럴 때면 ‘진짜 이걸 때려치워 말아?’ 하는 생각이 수십번 들었다.”

-그래도 잘 참았나 보다.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현대백화점 1호점을 앞두고 일본으로 교육을 갔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와세다 대학을 나왔든 동경대학을 나왔든 전부 생선코너에 가면 회를 뜰 줄 알고 모든 일을 척척 해내더라.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맡은 일에 대해서는 완벽한 ‘프로’였던 그들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그 후로는 지금 하는 일들이 언젠간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게돼 마음이 편해졌다. 나중엔 단련이 돼서 슈퍼의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는 생선코너에서 칼질까지 했다.(웃음)”
백화점 사업의 꿈을 품고 입사한 지 8개월 만에 그는 꿈에 그리던 백화점 사업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당시 백화점 업계는 롯데·신세계가 주름잡고 있던 상황. 현대의 유통사업은 새롭게 시작하는 걸음마 단계 수준이었다.

-백화점으로 유명한 롯데나 신세계에 입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곳들은 재미 없어보였다. 이미 성공한 곳보다 새로 백화점 사업에 진출한다는 현대가 끌렸다. 당시 현대가 첫 백화점 진출을 앞두고 한 대학 교수님을 초청했었는데, 그분이 강의 마지막에 한 말이 생각난다. 교육을 마치고선 갑자기, ‘현대가 백화점을 한다고 해서 왔지만 성공하지 못할 거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성공한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 우선 앞에는 고가도로, 뒤에는 한강을 두고 있던 압구정의 터가 백화점에 적합한 자리가 아니고, 또 현대의 기업문화를 문제 삼았다. 자동차나 배를 만들던 회사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유통사업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더라. 잘해보자고 부른 교수가 그런 말을 하니 기가 팍 죽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못 한다고 전문가들이 단언하는데, 과연 성공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도전의식이 생겼다.”

▲ 양창훈 대표가 신입사원 시절 설명을 하며 미소짓고 있다.

모두가 걱정하던 현대백화점 1호점은 보란 듯이 대박을 쳤다. 그도 함께 백화점 안에서 점차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이후의 행보는 승승장구였다. 동기보다 늘 1년 이상 빠른 특진의 연속이었다. 계속 현대에 머물렀다면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유통업체의 임원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는 돌연 첫 직장을 떠나고 작은 중소기업의 대표이사로 옮기게 된다. 이후 풀무원의 대표로 자리를 잡나 싶더니 얼마 안 가 결국 ‘친정’인 현대로 돌아온다. ‘대표이사’의 직함을 얻으며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영업 본부장’이었다.

-대표님 소리를 듣다가 본부장님으로 격하(?)됐다.
“우성식품이라는 회사를 거쳐 풀무원의 대표로 있을 때였다. 당시 하고 있던 일들도 잘 되고,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현대가 어렵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때 내 ‘사수’격인 최동주 전 사장이 아이파크몰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최 사장님이 제발 와달라고 손을 내미는데 고민이 많이 됐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풀무원도 큰 회사였는데, 간다면 손해 아니었나.
“좋은 조건에 모셔가는 것도 아니었고, 뻔히 어려운 길이라는 게 보였다. 지금 풀무원에서 잘하고 있는데 괜히 저기 가면 고생만 진창 할 게 분명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답은 분명했었다.”

-대우도 전에 비하면 변변치 않았을 텐데.
“풀무원에서는 차도 줬었고, 월급도 많았다. 사실 최동주 전 사장에게 ‘월급 얼마 주실 건데요?’ 하고 물었으나 답은 뻔했다.(웃음)”

-돈보단 의리를 택한 건가.
“돈만 따졌다면 갈 이유가 없었다. 일주일 내내 고민해서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최동주 전 사장 같은 ‘사람’들 덕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심을 마치고 집사람에게 현대로 간다고 하니 미쳤느냐고 팔짝 뛰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나이들의 정이라고 할까.(웃음)”

-돌아가 보니 상황이 어떻던가.
“지금 용산 아이파크몰이 원래는 ‘스페이스 9’이었다. 스페이스9은 동양 최대규모라는 전자상품 전문매장을 표방하며 시작했지만, 용산 전자상가와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패션 브랜드 유치에 실패해 1년 넘게 슬럼화 되있던 상황이었다. 마치 유령의집 같았다. 최동주 전 사장과 상호를 아이파크몰로 바꾸기로 하고, ‘몰’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장 큰 고비가 남아있었다. 스페이스9과 계약했던 상인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설득했나?
“당시 슬럼가처럼 비어있는 공간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계약자도 회사도 다 죽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고민하다가 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뭘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당시 상인들은 1년도 넘게 엉망인 상가를 두고 고생하던 터라 보증금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의 보증금도 보장해주고 회사도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다.”

-찾은 답이 뭐였나.
“먼저 상인들을 찾아다녔다. 임대 상인들을 만나고 또 만났지만 마음의 문을 열기가 너무 힘들었다. 회사 측의 말을 도통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계약자가 2800명 정도 있었는데 대표자 100여명과 함께 워크숍을 떠났다. 가서 허심탄회하게 토의해보자고 제안했다. 2박 3일동안 밥도 먹고 구보도 뛰며 함께 생활했다. 저녁엔 하늘을 보며 술 한잔도 기울였다. 그 분들도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겠나. 다 같이 소리도 질러보고… 그래도 그들이 반신반의하자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상인들에게 전적인 경영의 위임을 받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보증금을 보장해주기로 했고 5년 안에 흑자가 나지 않는다면 회사가 다 감수하기로 했다. ‘지금 동의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책임질 것이고 아니라면 보증금이 까지든 말든 상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경영위임 계약서를 쓰는 상인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후 주주들까지 설득해 1600억 규모의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그렇게 용산 아이파크몰이 탄생했다.”

-올해가 약속했던 5년이 되는 해다.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패션관은 올해부터 이익을 내는 중이고, 리빙관 같은 경우는 일년정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몇년 전에 일어난 용산참사 영향으로 용산 개발이 더뎌져서 전체적으로 계획이 미뤄졌다. 하지만 5년 전 그려놓은 그림에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처음 아이파크몰이 생길 때만 하더라도 ‘몰’의 개념은 전무하지 않았나.
“처음에는 아이파크몰에 있다고 하면 ‘인터넷 쇼핑몰이요? 어떤 거 취급하세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웃음) 어디까지가 백화점이고 어디부터가 전자 매장이냐며 헷갈려하는 손님들도 많았지만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요즘은 ‘몰’을 모르는 사람이 촌스러운 사람이 됐다.”

-몰 내의 이벤트파크나 풋살장 등이 눈에 띈다. 매장으로 채운다면 수백 점포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리석은 생각이다. 몰 안에서 하나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목표다. 그런 공간들이 소통의 장소이자 광장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벤트파크에서는 별의별 행사를 다 한다. 문화 행사 등에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아이파크몰은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다.”

-본인을 어떤 CEO라고 생각하나.
“내가 대표로 취임하면서 주력했던 게 권한 위임이다. 위에 몰려있는 집중적인 일들을 아래의 직원들에게 많이 내려줬다. 자율권을 주려고 한다.”

-자율권이 늘어난다면 잘못된 판단도 늘어나지 않을까.
“고객을 상대하는 몰 같은 경우 ‘현장’이 가장 중요하다. 고객이 와서 컴플레인을 했는데 만약 직원이 ‘우리 과장님께 물어보고요’ 과장은 ‘부장님께’, 부장은 ‘전무님께’ 이렇게 된다고 생각해보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빠른 판단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야기 하는 게 ‘현장 대응, 사후 결재’다. 직원들에게 항상 현장에서는 너희들이 사장이라고 말한다.”

-학창시절 생각하던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나.
“음…지금은 과정이다. 아직 배가 고프다.(웃음)”

-그렇다면 최종 꿈은 뭔가.
“아이파크몰에서는 내가 최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고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 최고가 되는 것이다. 내가 머리가 하얗다고 인생의 황금기가 아닌 건 아니다. 황금기는 이미 한번 거치지 않았느냐고 다들 말한다. 하지만 올해 봄이 지나면, 내년에 봄은 또다시 온다. 더 큰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

 

백화점이 아니다. 이젠 몰의 시대다

사장실로 올라가는 아이파크몰 7층, 풋살장이 눈에 띈다. 도시 한복판에 웬 풋살장이냐 싶었는데 엄연히 국제규격까지 갖춘 정식 풋살장이다. 상점으로 빽빽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왜 내버려뒀느냐고 묻자 이게 바로 진정한 몰링(Malling)이라고 답하는 양창훈 대표이사. 그렇다면 과연 ‘몰’은 무엇이고 ‘몰링’은 무엇일까? 몰은 상점이 한데 모인 복합 쇼핑몰을 뜻하고 몰링은 복합 쇼핑몰에서 쇼핑뿐만 아니라 여가도 즐기는 소비 행태를 의미한다.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서 최단거리 직선코스로 달리며 머릿속에 있는 구매목록을 되새기던 시대는 이미 갔다. 이젠 백화점이 아니라 ‘몰’의 시대다. 바쁘다는 말이 입에 익은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이 한 데 모여 있는 몰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아이파크몰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소비자들은 물론 계약자들까지 반신반의했었다. 당시 각 층마다 다른 품목을 판매하는 세로형 백화점에 익숙해져 있던 주부들은 좌우로 길게 뻗은 몰의 규모를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나 양창훈 대표이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몰을 안내하는 몰 내비게이터등을 설치하며 소비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이제는 단순히 물건을 팔고 사기만 하던 백화점의 시대가 가고 문화를 표방하고 즐기는 몰의 시대가 왔다. 신도림 디큐브시티, 영등포 타임스퀘어 등 이제는 너도나도 ‘몰’을 표방하고 있다. 숨 막힐 듯이 빽빽이 들어찬 도시가 지겹다면, 도심을 떠나 자연으로 가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몰’을 찾아가보자. 도시 한복판의 문화가 살아 있는 여가 공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CEO의 하루는 어떻게 다를까?

“매일 매장을 돌아본다. 
단, 직원들은 몰라야 한다”

아이파크몰에 처음 가는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둘러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곳곳에 지도가 배치돼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몰. 규모로 코엑스의 두 배가 넘는다는 몰을 운영하는 대표이사의 하루는 어떨까. 매장만 한 군데씩 돌아다녀도 하루가 금방일 것 같은데 매일 잊지 않고 매장 곳곳을 돌아다닌다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아침 몇 시부터 스케줄이 시작되나.
“보통 5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다. 따뜻한 국이 있는 아침식사는 빼놓은 적이 없다. 그만큼 와이프가 잘 해줬다는 뜻이 아닌가싶다.(웃음) 그리고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출근을 해서 여덟시 쯤 회사에 도착한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뭔가.
“내 좌우명이 역지사지와 일신우일신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해보자, 그리고 매일매일 새롭게 살자. 그래서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일을 해볼까’하고 고민한다. 명상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면서 하루 할 일을 쭉 정리해 본다.” 

-스케줄이 만만찮을 것 같다.
“그렇다. 정신없는 만큼 회의를 갔다 와서도, 식사 전에도 식사 후에도 계속 일정을 확인한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서 만날 사람도 많고 돌아다닐 곳도 많기 때문이다. 집에는 항상 늦게 들어간다. 술 먹으러도 가야하니까(웃음). 술 먹으면 폭탄주를 먹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 그래도 일어나는 시간은 변함없이 5시 반이다.”

-매일 빼놓지 않고 매장도 돌아다니는 걸 보면 체력이 굉장히 좋은 것 같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간 편이다(웃음).”

-매장을 둘러볼 때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나.
“앞보다는 뒤를 보는 편이다. 앞에 보이는 부분은 다들 잘해놓는다. 주차장이나 창고, 기계실 같은 후미진 곳을 본다. 그런 곳이 잘 되어 있으면 보이는 곳도 잘 돼있다는 거다.”

-이런 이야기가 직원들에게 좋은 팁이 되겠다.(웃음)
“요즘엔 다 알더라. 그래서 예상 경로를 비껴가기도 한다. 서로 신경전 하는 셈이다.(웃음)”

-매장에 출몰하면 직원들 군기가 바짝 들고 그렇겠다.
“아니다. 혼자 몰래 돌아다니는 편이라 그런 일은 없다. 수행비서를 대동해서 매장으로 나가면 바로 소문이 난다. 매장의 우선은 언제나 고객인데 사장이 수행비서를 거느리고 돌아다니면 고객들 입장에서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매장 운영을 잘하겠다고 하는 일이 고객들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다. 개선사항 같은 건 다 둘러보고 뒤에서 이야기하는 편이다.”

-본인에게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 정도 줄 수 있을까.
“백점이 만점이면 아직 칠십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은 삼십점을 채우기 위해서 계속 갈고 닦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설렘이다. 아직도 입학했을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한다. 재수를 통해 힘들게 대학에 입학한 순간, 머릿속에 무한한 꿈이 펼쳐졌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중앙대를 떠오르면 그때의 설렘이 떠오른다. 입학할 때 청룡상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술 마시던 기억, 노란 개나리가 필 무렵의 청룡 연못 앞에서 품었던 희망이 되살아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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