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에네르기로 충만했던 한 시기를 꼽는다면 아마 세종대가 아닐까 싶다. 한글의 창제를 비롯해 천문 과학기기의 발명, 인쇄술과 화포의 개량, 각종 농서와 의약서의 편찬이 이때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오백 년을 지탱해 준 각종 의례와 제도, 도량형과 수취체제가 이때 정비되었다.


  그렇다면 세종대의 그같은 역동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실직서(以實直書)와 논찬부작(論贊不作)이라는, 세종대에 마련된 『고려사』의 편찬 원칙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사실대로 쓰고, 그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있는 그대로를 읽고 각자 판단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그렇게 조성된 창조의 여백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결’(context)을 읽는 안목과 융합적 사고를 곁들여 절세의 작품들을 수놓았으니, 그것이 세종대 문화 창달의 요체였다. 자유로운 영혼, 결을 읽는 안목, 융합적 사고의 삼위일체였다고나 할까.


  먼저 관노 출신의 장영실을 발탁해 중국에 유학을 보내고 관직을 주어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준 세종과, 세종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등을 발명하며 주눅들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한 장영실은 모두 신분제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다음으로 결을 따라 고기를 썰면 칼날이 상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세종대의 창조적 작업들은 무엇보다 결을 중시하였다. 『농사직설』을 편찬할 때 중국의 선진 농법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각 지방의 농사 잘 짓는 농부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 노하우를 먼저 정리토록 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덧붙여 세종대의 창조적인 작업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있었다. 세종이 아악을 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은 음악을 통해 법이 아닌 예로 다스린다는 유교의 예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아악의 기본음을 내는 황종관의 길이와 그 속에 담기는 물의 부피와 무게로 도량형의 기준을 삼아 경제 제도를 정비하려는 의도와도 맞물려 있었다. 음악과 정치, 경제의 융복합 단초를 선구적으로 놓은 것이다.


  이같은 세종대의 지혜를 누구보다 깊이 새겨야 할 곳이 오늘날의 대학이다. 대학은 자유로운 지성들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때문에 창조의 동력을 어떻게 극대화시키느냐에 대학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을 서열화하는 각종 평가와 관행들로 자유로운 영혼이 뛰어 놀 창조의 여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중앙대의 결에 맞춰 미래의 발전전략을 구상하기보다 시뮬레이션조차 제대로 안 된 설익은 조치들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쏟아냄으로써 개혁피로증후군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다양한 학문 분야의 균형적 발전을 도외시함으로써 지식 기술의 융복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진지하게 성찰해 볼 일이다.

장규식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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