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사장, MBC 제작본부장, 청와대 비서실 국내언론총괄국장, 예술의전당 이사, 여수엑스포 총감독… 중앙대 출신 문화계 인사들의 직함이 아니다. 단 한사람이 걸어온 길이다. 스타PD도 많고, 영화계 거물들도 많지만 고석만(연극영화학과 68)처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이 정도 했으면 더 이상 이룰 일이 없어 보일 정도지만 그는 여전히 욕심이 많다. 얼마 전엔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모교에서 강의까지 한다. 인터뷰는 그의 예술대학원 강의가 있던 날 밤에 이루어졌다. 8시에 시작한 수업은 첫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났다. 2시간이 넘는 강의를 하고난 후였지만 그에게 지친 기색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내가 하는 모든 작품이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
혼신의 힘을 기울이죠”


-73년도 연극영화학과 졸업과 동시에 MBC에 입사했다. 첫 작품은 뭐였나.
“입봉작은 어린이 드라마였어요. 그 시절엔 보통 PD들이 어린이 드라마로 작품을 시작했어요. 그때 만들었던 게 <엄마를 찾아서>라는 드라마였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 일일드라마를 만들었어요. 획기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죠. 다음 작품도 <달려라 삼총사>라는 어린이 드라마고요. 그때 최불암, 김혜자씨를 캐스팅해서 화제가 됐었죠.”
-어린이 드라마에 당대 톱스타가 출연하다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제가 최불암·김혜자를 캐스팅하자고 하니 다들 비웃었죠. 어린이 드라마에 과연 출연하겠느냐고요. 섭외할 수 있다며 큰소리 뻥뻥 치고 나와 최불암씨를 찾아갔어요. 최불암씨에게 왜 어린이 드라마를 해야 하는지, 무슨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린이 드라마의 파급력, 진실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씨알도 안 먹히더라고요.(웃음) 이렇게 실패하나 싶었죠. 그때 제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최선배, 선배 자식들 동녘이 동비에게 탤런트 아버지로서 해준 게 뭐가 있어요? 아들딸에게 뭐라도 해주려면 어린이 드라마에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말이 먹혔던 거죠. 그 자리에서 확답받았고, 드라마가 아주 잘 됐죠.”
-그 이후 맡은 작품이 <수사반장>이다. 이미 인기가 많은 프로여서 부담도 됐겠다.
“선배들이 잘 구축해놨었죠. 그런데 제가 연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정 수사물’이었어요. 무슨 말이냐면 최불암 선배가 범죄자를 쫓다가 결국 마지막엔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용서하고 극을 마치는 내용이 반복됐어요. <수사반장>을 맡으면서 ‘기존의 인정수사물은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과학·사회 수사물을 해야 한다’고 했죠. 결국 작전이 먹혔고 승승장구했죠.”
-<수사반장>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치드라마 1호라고 볼 수 있는 <제1공화국>을 연출했다.
“<제1공화국>은 명실공히 한국 TV 드라마의 금자탑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 시절이 유신 정권시대인데, 어디에서도 진실을 볼 수 없던 시대에 TV로 사회현상을 보게 해줬던 거죠.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고요.”
-<수사반장>은 단순한 드라마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데.
“이 드라마가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시작할 때부터 확신했어요. 범죄를 추리하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범행 동기를 찾아 사회 현상을 그리려고 했죠. 예컨대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어떤 대학생이 어머니가 보따리장사로 힘들게 번 대학등록금을 내러 학교를 가는 길에 등록금을 갈취당한 거예요. 가만히 뺏길 수는 없으니 꽁꽁 얼어버린 길바닥에서 도둑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어요. 그런데 도둑이 그 학생을 수백 미터 끌고가다 도망을 칩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일반 수사물이지만, 저는 범죄현상을 목도하고 방조했던 목격자들을 주목했어요. 범인이 학생을 수백 미터를 끌고 갈 동안 그 현장을 묵과했던 사람들도 공범이라는 거죠.”

73년에 MBC에 입사한 그는 MBC를 떠나는 95년까지 20년간 <수사반장>, <제1공화국>, <야망의 25시> 등을 연출하며 사회성 짙고 선 굵은 드라마의 대가로 불렸다.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가 됐다.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길법도 한데.
“사실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다른 사람들이 잡으러 오기 어려웠을 거에요.(웃음) 그런데 저는 소위 스펙으로 따지면 자격 미달이었던 사람이에요. MBC에도 못 들어올 뻔 했고요.”
-처음부터 1등은 아니었다는 건가.
“요즘으로 따지면 토익이 기본으로 900점은 되야 할텐데 전 영어점수 같은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영상실기로 입사하는 방법이 있어서 그쪽을 통해 들어왔죠. 졸업장도 가까스로 받았고, 학벌이 특출나게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힘들었죠. 그래서 남들보다 3배 열심히 일했어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전문서적을 옆에 끼고 살았어요. 하루에 10분이라도 볼려고 얼마나 노력 했는지 몰라요. 원래 목표는 30분이긴 했지만.(웃음) 3배 정도 열심히 하면 10년이면 따라잡을 수 있겠지 했죠. 그런데 5~6년 지나니 따라잡더라고요.”
-MBC에서 나간 이후 영화제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영화에 꿈이 있었나.
“궁극적으로 하고 싶던 건 영화에요. 대학 시절에 학과장이셨던 최영남 교수님께 영화 연출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시나리오부터 제대로 써오라’고 면박을 주시며 연출을 원했던 저에게 대학극장 오디오 담당을 시키셨어요. 오디오를 담당하다가 어느 정도 지나 이제 연출하나 싶으면 조명 담당을 하고… 그 사이에 기획서를 몇 번은 냈는데, 항상 퇴짜만 맞고 카메라 담당까지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지나니 학교의 기자재 담당을 맡고 있더라고요.(웃음)”
-결국 학창시절 제대로 된 연출은 못해본 건가.
“아뇨. 군 제대한 후엔 혼자서 연출을 폭포처럼 했죠. 3학년 때부터 한 학기 동안 3분짜리 단편부터 30분짜리 중편까지 총 16편을 만들었어요. 필름 값을 대기 위해 밤새 아르바이트 하며 영화를 찍었죠. 어느 정도였나면, 출출하다고 라면을 먹는 친구를 보면 미친놈이라고 했어요. ‘필름 살 돈도 부족한데 지금 라면을 먹고 있어?’라고 생각했어요. 돈만 생기면 필름을 사고 정말 열심히 했죠. 나중에 생각해보니 1, 2학년 때 카메라, 오디오, 기자재 이런 것들을 다 완벽하게 습득했던 게 연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교수님께서 바로 연출을 시키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교수님이 저를 좋게 보셨대요. 그때 말씀하셨던 게 ‘내 제자 중에 연극영화 쪽에는 고석만, 음악 쪽에는 박범훈 둘만 있어도 만족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들어갔던 곳은 충무로가 아니라 방송국이다.
“사실 방송 일을 우습게 알았었어요. 솔직히 방송국에 가면 1등 할 것 같았어요.(웃음) 오만방자했죠. 얼마나 건방졌었느냐면, 당시 MBC, TBS, KBS 세 군데가 있었는데 TBS는 연출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내가 가서 힘을 못 필 것 같았고, KBS는 왠지 싫었고, MBC에 가면 내가 1등 하겠다고 생각했죠. 뭐 젊은 시절 패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이후 200억이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 <제이슨 리>를 기획했지만 무산됐다.
“미국이 기술을 책임지고, 일본이 자본을 끌어오고, 한국이 콘텐츠를 만드는 삼국 공동의 환상적인 구도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미국과 공동 연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복잡해지고, 결국 시작을 못 했죠. 헐리우드 가겠다는 꿈에 부풀어서 헐리우드용 패션, 헐리우드용 이름까지 다 만들어 놨었는데…(웃음) 아쉬웠죠.”
-계속 연출을 하다가 98년 갑자기 청와대로 향했다. 의외였다.
“당시 SBS와 계약 건으로 오해가 생겨 일선에서 손을 떼고 휴식을 취하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연출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와서 하게 됐죠. 청와대에서 일해달라는 얘기는 그전부터 있었는데, 처음엔 전혀 생각도 하지 않다가 두세 번 이야기를 계속 들으며 마음을 바꿨어요. 그곳에서의 일도 넓은 의미에선 연출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드라마 연출과 국정홍보 연출은 다른 부분이 많았을 텐데.
“<국민과의 대화>를 할 때는 단순 드라마, 예능, 쇼 연출하듯 해서는 안됐죠. 국가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했어요. 짧은기간 동안 엄청나게 공부를 했어요. 이 기회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이었어요. 세상을 최고의 정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됐죠.”
-정치에 입문하라는 제의는 없었나.
“처음부터 정치는 전혀 꿈도 안꾼다고 선언했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이후 K-TV 사장, EBS사장, MBC 제작본부장을 역임하며 방송경영인으로 탈바꿈한다. 연출을 할때와 ‘사장’일 때중 어느쪽이 더 좋은가.
“지금도 저는 현장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하고싶은 건 연출이고요. 그런데 나이 들었다고 의뢰가 안들어와요.(웃음) 제가 나서서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도 들고…”
-얼마전에 여수엑스포가 끝났다. 엑스포의 총감독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모든 전시, 엑스포의 문화는 다 총감독단에서 만들어요. 사실 공무원들은 엑스포를 이야기할 때, 총감독단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죠. 하지만 총감독단이 모든 콘텐츠의 주인공이거든요. 엑스포는 제가 생각하는 문화에 대한 철학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어요.”
-여수엑스포를 평가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콘텐츠에 대해서는 확실한 성공작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숫자의 압박 때문에 운영 상에 차질이 많았던 점을 가장 아쉽게 생각하고 있죠.”
-같은 시기에 일했던 김종학·황인뢰 PD는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다. 부러움은 없나.
“부럽죠. 하지만 지금 제 삶도 좋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현장에서 연출을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고,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직도 받아들인 거고요.”
-여수엑스포에 이어 전주국제영화제까지 쉴틈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지금 해야할 일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몇 년 후를 미리 기획하고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전혀 없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최대한 충실하려고 해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최고의 콘텐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무지 어려운 질문인데… 아직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나올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이야기하며 미소짓고 있는 고석만위원장.

 

 

 

 

 

 

 

 

고석만의 인생 시나리오

1973 
MBC에 입사하다
그가 입사했던 73년, 그는 유일한 중앙대 출신이었다. 내세울 영어점수조차 하나 없던 그에게 내세울 것은 패기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남들보다 3배의 노력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1978 
<수사반장>의 새로운 시작을 이끌다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수사반장 테마송이 울려 퍼지면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TV 앞으로 모여들게 한 최고의 인기 드라마. 그가 연출봉을 잡은 후부터는 인정수사물이 아니라 사회수사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1981 
정치드라마 1호 <제1공화국>
정부를 향한 신랄한 비판으로 호평을 받은 SBS 드라마 <추격자>의 탄생은 <제1공화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진실이 가려져있던 유신시대에 세상을 향한 한줄기 진실의 빛을 열었다

1997 
영화감독의 꿈 <제이슨 리>
시카고를 무대로 암흑가를 주름 잡았던 전설적인 한국계 갱스터 제이슨 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3천만 달러가 투자되는 대규모의 영화였지만 저작권을 둘러싼 싸움 탓에 결국 제작하지는 못했다.

1998 
대통령의 ‘귀와 입’이 되다
<국민과의 대화>를 연출한 인연으로 대통령에게 들어오는 모든 소식과 대통령 밖으로 나가는 모든 소식을 관리하게 된다. 그는 대통령에게 유일하게 NG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불렸다.

2003 
EBS의 황금기를 만들다
그가 EBS에 재직했던 기간은 1년 7개월로 짧았지만 그가 이룬 업적만큼은 어느 사장보다 화려하다. <스페이스 공감>, <EBS 다큐페스티벌>, <수능방송>, <명동백작> 등이 그의 작품이다.

2005 
그의 친정 MBC로 다시 돌아오다
그가 MBC 사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EBS 사장직의 3년 임기를 불과 절반 정도만 채운 채 EBS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MBC 사장 공모에서 탈락하고 결국 MBC 제작본부장으로 친정에 돌아가게 된다.

2012 
그의 철학이 담긴 <여수엑스포>
여수엑스포의 대표 콘텐츠 ‘빅 오쇼’, 모두를 신기하게 만든 ‘듀공’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2년 반 동안 자신의 모든 철학을 쏟아 부어 사명감으로 세계적인 축제를 만들었다.

2012.09 
다시 시작된 꿈, 전주국제영화제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가 다른 방법으로 영화인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모든 작품이 첫 작품이라며 항상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던 그의 새로운 전주국제영화제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자극제다. MBC에 입사했을 때 중앙대생은 거의 없었다. 당시 초 일류대학은 아니었던 중앙대라는 나의 배경은 남들보다 3배 더 열심히하게 만들어줬다. 내가 만약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초 일류대학을 나왔다면 이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대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존재다.”

 

1년 7개월 동안 그가 만들어낸 EBS의 기적들

“내가 부임한 순간부터 시청률 표는 없는 겁니다.” 고석만은 EBS에 부임하자마자 PD들에게 시청률 표 금지령을 내렸다. 직원들이 언제부턴가 시청률의 노예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시청률 표를 나침반으로 삼던 PD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6개월쯤 지나자 제작자들은 시청률에 가려져 만들지 못했던 ‘진짜 자신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청률을 버리니 시청자가 보인 것. 그 결과 EBS 프로그램은 획일화된 모습을 버리고 모험적이며 다채로운 EBS만의 색을 갖추게 된다. 1년 7개월이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재직하면서 그는 EBS의 역사를 그의 부임 전과 후로 나뉘게 했다.
그는 공연장을 계획하며 먼저 놀고 있던 강의당을 뜯어고쳤다. 3~400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170명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구조로 설계했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그는 밀어붙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연장은 무대와 객석이 불과 50cm 떨어져 있었고, 그 덕에 가수의 침이 관객에까지 튈 정도의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인디’에 손을 댄 것도 그다. <스페이스 공감>이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이 없다고 하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그의 지론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작은 것에서 나온다’다. 이는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도 이어졌다.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하루 24시간 중 17시간 동안 다큐멘터리만 방송시키는 모험을 감행한다. 세계역사상 그런 시도는 아직까지도 없다. 그는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하루에 한편이라도 본다면 성공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했던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은 바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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