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명문 교토대학이 올해로 창립 115주년이 된다. 중앙대학의 역사는 인사동 중앙교회 내 중앙유치원 창설로부터 시작되므로 94년의 역사를 갖게 된다. 20년 뒤졌다. 중앙대학의 역사가 짧은 것이 아니다.
 

  올 여름, 교토대학이 주관하고 한국시학회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 ‘한일 근대시의 제양상’에 발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교토대학의 교수가 시인 윤동주의 창씨개명 문제로 발표를 해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발표의 요지는 윤동주는 성을 갈았지만 이광수나 최남선, 김동환처럼 이름까지 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 명 일본인 교수는 한국의 모더니스트 시인 김경린이 일본어로 쓴 시에 대해 발표를 했고, 또 다른 일본인 교수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교토 도시샤대학 유학시절에 대해 발표했으니, 학술대회가 끝날 무렵에는 민족적 자긍심이 만신창이 되고 말았다.
 

  우리 문학의 근대화가 일본을 통해 이룩된 것이라는 뼈아픈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어서 기분이 찜찜했는데 가슴이 쓰린 시간은 그 뒤였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교내 탐방에 나서자 교토대학의 교수는 대학 ‘문서관’(우리로 치면 역사관)으로 한국에서 간 일행을 안내했다. 교토대학의 역사는 전시실 사진 속에서도, 안내원이 나눠주는 책자 안에서도, 영상물 속에서도 찬란하였다. 교토대학은 1949년 노벨물리학상, 1965년 노벨물리학상, 1981년 노벨화학상, 1987년 노벨의학상, 200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를 낳았다. 대학은 자신의 치부도 숨기지 않았다. 1969년 급진 학생들의 ‘전공투’ 시위 과정도 그 당시 텔레비전 뉴스를 편집하여 상세히 보여주었다. 교토대학은 자랑거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치부조차도 대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의 모교도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학교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관이 개관되면 얼마나 좋으랴. 학교를 방문하는 외부인사가 초창기 교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초대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설립자 임영신 총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역대 총장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면, 4·19혁명 시위대열에 앞장선 중대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봅스트홀을 세워준 봅스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안성캠퍼스 공사현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예술계열의 전신 서라벌예술대학 미아리 교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학교 로고의 옛 모양을 볼 수 있다면, 흑석동 먹자골목과 연못시장의 옛 풍경을 볼 수 있다면…. 각 단과대학의 명예를 빛낸 인물들의 활약상도 학교 역사의 귀한 자산일 것이다.
 

  그간 학교의 역사가 책으로 묶여진 적은 있지만 그 책을 외부인사나 학부형이 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진이나 기념품을 최대한 모으고, 대한뉴스 같은 필름을 찾아보면 중앙대 역사의 복원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교토대학을 나서며 부러움 반 부끄러움 반의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도 100년 역사의 자존심을 세우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승하 문예창작전공 교수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