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오   특종을 마다하는 이상한 연예기자

 

▲ 데스크에 앉아있는 김대오. 그의 책상에 홍보자료, 취재거리 등이 올려져 있다.

 

 

 

 

 

 

 

 

 

 

 

 

 

 

 

 

여기 특종을 자기 발로 차버리는 바보 같은 연예기자가 있다. 너무나 냉정하고 엄혹하다는 연예계에서 아직도 ‘사람’이야기를 하는 순수한 연예기자가 있다. 21년동안 정글같은 연예계에 있었으면 연예인에게 질릴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스타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연예저널리즘을 보여주겠다는 오마이스타 김대오 팀장(문예창작학과 85)을 만났다. 연예계에 작지만 큰 발걸음을 시작한 그의 책상은 여기저기서 보내온 홍보자료로 가득했다.
 
그의 기사에서는 사람냄새가 난다


인터뷰 며칠 전은 <오마이스타>의 1주년이었다. 그는 ‘찌라시’ 연예기사가 범람하는 가운데 의미있는 일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먼저 <오마이스타>창간 1주년 축하드립니다.
“이제 시작이죠.(웃음) 여기저기서 많은 응원도 듣고 있는데, 연예계에서는 나름 의미있는 한 해였다고 생각해요.”
-창간호에 맞춰서 발표하는 특종이 있다면요.
“지난 한 해 서태지·이지아 사건, 장동건·고소영 결혼 등의 특종도 있었죠. 하지만 늘 선정보도를 견제하고 인권을 보호하면서도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진짜 특종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오마이스타의 창간호 특종은 한성주, 이미숙씨의 이야기를 싣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계시는 거죠?
“사실 한성주씨 동영상 사건이 터진 12월 4일에 이미 한성주씨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어요. 인터뷰까지 작성했지만 게재하지 않기로 했어요. 진실을 알리는 것보다 위로가 필요했고, 진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가십거리로 받아들여질 뿐이었을 테니까요.”

2009년 故장자연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성접대 리스트’가 담겨있다는 문건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당시 해당 문건을 처음 본 사람이 김대오기자였다. 하지만 그는 해당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른 언론들이 선정적인 기사를 마구 쏟아낼 때 그의 기사엔 매번 ‘한국자살예방협회의 보도 준칙을 준수합니다’라는 표어가 적혀있었다.
-대한민국을 뒤집을만한 특종들을  제발로 찼습니다. 유혹의 순간은 없었나요.
“말로 할 수 없는 유혹이죠. 하지만 문건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가족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다만 문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미 있다고 판단해 문건의 존재자체만 알렸어요. 이부분은 제가 아직도 기특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보통의 연예기자들은 그런 유혹을 참기 힘들텐데요.
“인권을 보호하고 진실을 말하자고 하는 것이 건방지게 보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마저 없으면 선정성 경쟁에서 우리는 도태될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거에요.”
-故장자연씨 기사를 다룰 때 매번 ‘한국 자살예방협회의 보도준칙을 준수합니다’라는 표어가 적혀있어서 화제가 됐었죠.
“당시 자살기사 보도 준칙이 마련돼서 구체적인 자살 방법을 기사화 하지 말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하지만 준칙을 지킨 연예기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죠. 예를 들면 ‘A씨가 번개탄 몇 장을 사서 연탄불을 어디서 피웠다. 압박 붕대를 해서 샤워기 꼭지에다가 걸어서 목을 맸다’까지 보도해요. 친절하기도 하죠. 알려야 할 부분이 있고 알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거죠. 이런 기사는 자살을 조장할 뿐 전혀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故장자연 사건때 모든 기자들에게 그 표어를 붙이게 했어요.”
-이후에 다른 매체들도 반성을 한 것 같더군요.
“시작할 때부터 다른 매체들도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이후엔 더 나아가 장례식장에서 영화제 레드카펫처럼 조문객들 사진을 찍는 것들을 그만하자는 움직임도 생겼고요.”
-일반 연예기자들과는 다른 연예저널리즘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도 처음에는 나쁜 기사 많이 썼어요. 하지만 결국 문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죠. 연예인들을 금전적인 수익을 주는 대상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샌 연예인과 일반인이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해요. 대중들은 연예인을 헐뜯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죠. 사회적인 불만이 모두 연예계로 표출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저는 취재원에 대한 애정, 그 다음에는 독자들에 대한 애정. 여기서 다시 시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기자들은 ‘독자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선정적으로 썼기 때문에 독자들이 클릭을 하는 걸 수도 있죠. 양면성이 있어요. 하지만 독자들이 자극적인 것을 그렇게 원한다면 포탈 메인에 포르노를 싣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독자들이 원해서 기사를 쓰는 것은 핑계고 기자가 독자들의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민감한 진실에 대해서는 밝혀야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립니다.
“연예인 자살이 그런 경우죠. 이은주랑도 친했고, 유니랑도 친했고, 안재환은 저랑 마지막 방송을 했고, 최진실이랑은 마지막 술자리를 함께 했었어요. 다 친한 사람들이었는데 아직도 몰라요 왜 죽었는지. 그런데 죽음의 이유가 한가지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아요. 반면에 언론은 ‘우울증 때문이다. 남자 때문이다’. 자살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죠. 그 누구도 알 수 없는건데 말이에요.”

 

▲ 김대오씨가 기자 초년병시절을 떠올리며 웃고 있다.

기자들은 사회부로 시작해, 문화부·경제부·국제부 등 여러 부서로 옮기는 것을 숙명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의 연혁을 보면 일반기자와는 다르다. 잡지사 <비디오 플라자>에 입사한 이래 주부생활, 여성중앙, 스포츠 투데이등을 거쳐 21년동안 줄곳 연예부에만 몸을 담고 있다.
-원래 연예기자를 꿈꾸셨나요.
“아니요 우연히 시작했어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 문예창작학과에서 잡지쪽으로 많이 빠졌을 때거든요. 그런 영향도 있죠.”
-한때는 연예인들을 싫어했던 적도 았었다고 들었어요.
“연예계 기자 7년즈음 했을 때는 불특정 다수의 연예인에게 불타는 적개심에 싸여있었다고도 말해요. 그런데 결국은 그들도 같이 사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연예인들이 겉으로 보기에 워낙 화려해 다들 행복할 것 같잖아요. 하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상당 부분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애인이랑 둘이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밖에서 손잡고 영화라도 마음 편히 볼 수 있겠어요? 카페 가서 이야기 나눌 수도 없고, 어디 가서 데이트를 하겠어요?”
-글쎄요. 차 아니면 집에서.(웃음)
“얼마나 불쌍해요. 그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만나다보니까 속도가 빨라지는 거죠.(웃음)”
-처음에는 왜 그렇게 적개심을 가졌나요.
“그건 뭐 사귀는데도 안 사귄다. 매체 영향력 없어서 인터뷰 안 한다. 타 매체에만 특종 주고, 물먹고 돌아오면 데스크에서 깨지고. 어떻게 연예인이 좋아보일 수가 있겠어요. 나도 인간인데(웃음).”
-경력이 쌓이면서 연예인들을 이해하게 된거네요.
“겪다보니까 ‘아 그 상황에서 걔는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얼마전엔 후배기자들이 ‘이병헌·이민정, 알았는데도 그렇게 아니라고해서 못 썼었잖아요’라며 투덜댄 적이 있어요. 그럼 전 ‘걔네가 먼저 인정하겠니’ 하죠.(웃음) 요샌 그들이 인정하는 범위만 쓰기 때문에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해주는 경우도 있어요. 이야기해도 나가지 않을 걸 아니까.”
-지금 친한 연예인들은 누가 있나요?
“다 죽었죠. 허허”
-故최진실씨하고도 친하셨죠.
“최진실은 첫번째로 데스크에서 취재 지시받았던 연예인이었고, 죽기 전날 같이 술도 마셨던 인연이죠. 그 때 제 기자로서의 운명이 끝날 수도 있었는데… 최진실은 기자생활의 처음과 끝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최진실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최진실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던 그였지만 그녀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최진실이 죽었을 때 연예기자가 된 것을 가장 후회했다”고 말했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죠.
“저로서는 평생의 가치관을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장 가까운 친구는 살리지 못했으니까… 너무 슬펐죠. 당시 기사를 쓰라고 하는데 도저히 기사는 못쓰겠더라고요”
-반대로 ‘이럴 때 연예기자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때는요.
“최진실 복귀시켰을 때요. 이혼하고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장미빛 인생> 복귀 건을 두고 KBS와 MBC 사이에 갈등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최진실이 복귀해야하는 12가지 이유’를 썼고, 그걸 보고 원만히 합의해 KBS에서 재기한거죠.”
-현직에 언제까지 있으실 것 같나요.
“처음 기자일을 시작하면서 세운 계획은 45살이었는데, 2년이 초과했네요.”
-할일이 많으시잖아요.
“에이, 없어요.(웃음)”

 ‘오마이스타의 국자든 남자’라고 적혀 있는 그의 컵. 데스크에선 오로지 김대오 기자만 ‘국자’를 들고 기사의 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85학번 중 원서접수 1번이 저 일거예요. 그만큼 오고 싶었던 학교죠. 너무나 행복한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안성에서 경험했던 시골의 추억들… 추울 때 나무를 때기도 하고, 배추·무서리도 해가면서요.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주저 없이 중앙대 문창과를 선택할거에요. 가끔 문창과에 다시 가는 꿈을 꿔요.(웃음) 문창과가 없었다면, 연예기자로서의 지금이 없었지 않았을까요?”


“중앙대는  아웃사이더인 나를 기자로 만들어줬다.”

-고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고등학교 때는 대단한 아웃사이더였죠. 비오는 날이면 운동장 한가운데에 우산 쓰고 나가서 점심시간에 담배피고.(웃음) 선생님들이 쟤 이상한 애라고 때리면 안 된다고… 막 그랬어요. 그런데 문예창작학과 갔더니 그냥 평범한 학생이더라고요.(웃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거죠. 어딜가나 문창과 학생들은 티가 나요.”
-다른 학과에 진학했으면 어딜가나 튀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겠어요.
“중학교 2학년때부터 중앙대 떨어지면 추계예대, 추계예대 떨어지면 서울예전. 이런 확고한 생각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문예창작학과는 갔을거에요.”
-순수 예술을 하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으로 남의 이야기를 쓰는 기자가 되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저는 쭉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문창과에서는 백승철 교수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고요. 김동리, 서정주 선생님 마지막 수업을 들었던 학번이에요. 너무 예전이어서 모를거예요.(웃음)”
-그때 어떤걸 배우셨어요?
“사실 크게 배운건 없어요. 데모만 했으니까. ‘4·13 호헌 철폐 투쟁위원장 및 광주연맹 계승위원장’ 제 직함이었어요. 경영학과였던 박철민하고 같이 데모했죠.”
-위원장이면 선봉으로 서신건가요?
“아니요. 선봉까지는 아니고요. NL(민족주의 계열)이 다 도망가가지고.(웃음) 저는 PD(사회주의 계열)였고 박철민은 NL이였어요.”
-그럼 박철민 선배는 도망간건가요?
“서로 말 못할 어려움들이 있었죠.(웃음)”
-연극영화과와 함께 수업듣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85학번 동기들이 박중훈·변우민·전인화·김희애 등 유명인이 많죠.
“교양수업을 같이 들었어죠. 남자들끼리는 친해서 박중훈은 알았고, 여학생들은 건너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죠. 유동근씨와 같이 방송을 진행했었는데 ‘형수님이 학교 다닐 때부터 군계일학이셨다’고 말해줬죠.(웃음).”
-‘연예인의 산실’ 중앙대 출신이라는게 아무래도 도움이 많이 되시겠어요.
“이젠 그런거 없어요. 같은 80년대 학번끼리는 ‘저 문창과 85학번이에요’ 이런 말이 통하는데, 90년대 이후로는 서로 존댓말 쓰고 그러죠. 그 친구들한테 ‘저 문창과 나왔어요’하면, ‘예?’ 이러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기사 쓸 때 예쁘게 써주고 싶고, 마음이 가긴 하죠.”
-문예창작과 경험을 살려서 작품활동을 하는건 생각안 하시나요.
“해야죠. 조금씩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사람이야기를 쓰는 거죠 뭐.”
-기자 출신 김훈 소설가의 뒤를 잇는 건가요.
“택도 없죠.(웃음)”

  

▲ 사진은 설정 사진

 

 

 

 

 

 

 

 

21년차 연예기자의 핸드폰엔 연예인 번호가 몇개나 있을까?
‘지잉…’ 인터뷰하는 내내 그의 핸드폰 알림은 쉬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오는 메시지, 전화들로 그는 쉴틈이 없다. 핸드폰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유오성이다. 그에게‘형님. 파이팅 하세요♥’라는 문자가 온다. “인생이 하자인 유오성한테 또 문자가 오네요. 매일 왜 이렇게 하트를 붙이는지 몰라.(웃음)” 일반인들에게는 지나가다 마주치기만 해도 자랑일 연예인들과 문자메세지를 한다니. 연예기자 21년차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신기할 뿐이다.

핸드폰에 연예인 번호가 몇 개나 되나요.
“따로 세지는 않는데… 엄청 많겠죠?”
그럼 전체는 몇명정도 되나요?
“한 2500명 정도 돼죠.”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큰일 나겠어요.
“한번 잃어버렸었어요. 지금생각해도 아찔해요. 프랑스 파리였는데, 바로 모든 정보 삭제시켰죠. 요즘은 세상이 좋아서 그런 것도 다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예전에는 어떤 기자가 취재수첩을 잃어버려서 어떤 배우가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어요. 조심해야 돼요.”

 

 

오현경, 한성주, 이미숙… 그녀들 곁에 그가 있었다.
김대오 기자는 유난히 여배우들과 인연이 깊다. 시작은 오현경이었다. 오현경 사건, 일명 ‘O양 비디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남자 함씨가 어느 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성인인터넷방송으로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말하고 있던 기자회견장, 대부분의 기자가 가십거리 기사를 따내기 위한 질문에 혈안이 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한 짓 때문에 어느 한 여자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압니까 모릅니까?” 이후 상황은 급 반전돼 함씨는 30분도 안 돼 황급히 기자회견장에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한성주 동영상 폭로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도 김대오 기자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는 상처 입은 동물처럼 방 한 구석에 담요를 두르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한성주씨가 “내가 뭐를 해야 하죠?”라고 묻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말했다.
이미숙이 17살 연하남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할 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미숙씨는 자신을 위로하는 김대오 기자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팔자는 왜 그래.” 그는 초연하게 대답한다. “이게 내 팔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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