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은 이야기 하나가 너무 웃겨서 소개를 한다. 내용인즉, ‘예전에 헤어진 첫사랑을 만났는데, 그 첫사랑이 남자를 잘못 만나 지지리 궁상으로 살고 있으면 가슴이 너무 아프지만 그 첫사랑이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서 잘 살면 왜 배가 아플까’라는 우스갯소리였다. 왜 그런 두 개의 마음이 우리네 마음에 공존할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과도 일맥상통한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측은지심이 발하는 착한 심성이지만, 잘난 사람을 보면 괜히 시기의 마음이 드는 것이다. 자기보다 다들 못나야하니 칭찬에 인색하고 남의 장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남의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꾸짖고 몰아붙이면서, 정작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너무나 관대하게 처신하는 사람이 신문지상에 연일 나오고 있다.

  상황 1: 식당에 가보면 간혹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쳐다보고만 있을 뿐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귀여워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야단이라도 치노라면 부모들이 “왜 남의 귀한 애들 기를 죽이냐!”라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참는 것이다. 식당주인이나 다른 손님들은 뛰어다니는 아이와 아이 부모가 못마땅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저 말도 없이 각자 식사를 하면서 모두들 속으로 그 아이와 부모를 엄청 비난하고 있다. 그 부모와 아이만 이를 모르고 있을 뿐.

  상황 2: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교수님께 논문심사를 부탁하면서 농담으로 ‘심사 중에 논문제출자에게 너무 심하게 꾸짖지는 말아 주세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 교수님이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지금까지 지은 업을 풀기도 시간이 모자란데, 남에게 아픔을 주는 새로운 업을 쌓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순간 그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준 업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알지도 못하고 지은 업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날 이후로 나도 업 지우기 작전에 들어갔다. 퇴근길에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환하게 켜진 형광등을 끄고, 무심히 돌아가는 에어컨도 끈다. 이 작은 행동으로 내가 지은 업 가운데 일부라도 지워지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기대감을 갖고서.

  아직도 주위에는 남의 작은 실수에 눈을 부라리면서 목청을 높이며 준열히 꾸짖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혼자 착각하지만 본인이 정작 주변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또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행동은 정당하여 용서받는 것이 마땅하고, 어리석은 국민들은 모두 이해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과거의 업을 지우기는커녕 새로운 업을 끊임없이 쌓고 있다. 그 용맹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소심한 국민들은 연일 놀라울 뿐이다. 오늘은 수업하면서 ‘염치’에 대해서 학생들과 꼭 토론해볼까 한다.

남영준 문헌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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