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헬렌 브라쇠르. 그녀는 1972년 한국에서 맞는 첫 크리스마스에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 선물은 바로 배현정(裵賢貞). 그녀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배현정이란 이름으로 한결같이 환자들과 함께 살아왔다. 지난달 22일.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한 전·진·상 의원에서 배현정 원장을 만났다. 쉽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간 건강이 좋지 않아 인터뷰를 계속 미뤘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만난 만큼 그녀는 기분 좋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그녀가 털어놓은 그녀의 삶은 봉사 그 자체였다. 

-원래 직업이 의사가 아니었다. 벨기에에서 간호사로 활동했는데.
“저희 아버지는 약사셨어요. 약국이 탄광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가 가난한 광부와 이민자였죠.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질병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자랐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크면 가난한 환자들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대학도 간호대학으로 갔고요.”
벨기에에서 간호사의 삶을 살던 1972년. 그녀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가톨릭 평신도 단체인 국제가톨릭형제회를 통해 한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 벨기에 간호사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나.
“말도 못하게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어요. 의료보험제도조차 없으니 많이 아프면 해결할 길이 없었어요. 병원은 비싸서 자주 갈 수 없으니 환자들은 약국에서 1차 치료를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는 의약분업이 안됐을 때니 약국에서 약사가 처방, 투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러다보니 부작용도 많았죠.”
-그래서 한국에 정착하게 된 건가.
“한국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이란 나라에 감동을 받았어요. 아프리카와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이 두 가지가 다 없어요. 저는 그래서 아프리카가 더디게 발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당시 한국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보였어요. 그랬기 때문에 더 한국에 머물고 싶은 욕심이 컸던 것 같아요.”
-벨기에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지 않나.
“유럽 국가들은 복지가 잘 돼있잖아요. 당시 벨기에도 마찬가지였죠. 한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어요.”
-가족들이 만류하지는 않았나?
“말리진 않았는데 많이 놀라셨죠. 일단 국제가톨릭형제회에 소속되면 독신생활을 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해요.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죠.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제 삶에 기초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허락해 주었어요.”
한국 생활 3년 차였던 1975년, 그녀는 당시 3만5000명의 빈민이 있던 서울 시흥동 판자촌에 37평짜리 주택을 매입해 전진상 가정복지센터(전진상 의원의 전신)를 개원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전진상 가정복지센터가 설립되고 어떤 활동을 했나?
“가난한 환자들을 주로 간호했어요. 무료진료소를 열고 주말에는 왕진을 다녔죠. 하지만 상주 의사가 많이 없으니 활동을 하면 할수록 어려움에 부딪혔어요.”
-어려움이라면?
“서울대에서 의사선생님들이 일주일에 2번 오셔서 진료를 도와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어요. 팀원끼리 상의를 했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우리들 중 한 명이 의사가 되자는 거였어요. 상주 의사를 모셔올 돈도 없었고 돈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일할 만한 의사를 찾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의대에 가게 된 건가.
“외국인은 편입시험을 봐서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저는 한번도 의사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간호일이 너무 좋았거든요.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팀에서 결정한 사안인데.”
-왜 중앙대 의대였나? 가톨릭 신자였으면 가톨릭대학교 의대를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초창기 전진상 의원이 생길 때부터 김중호 신부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신부님이시면서 의학박사셨는데 당시 중앙대 의대에서 라틴어 강의를 하고 계셨어요. 그분이 중앙대를 추천해 주신 거죠. 막상 결정은 됐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지’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아무 부담 없이 일단 따라갔어요. 교수님이 지금까지 공부했던 내용, 간호사로 활동한 내용을 전부 서류로 만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고 편입시험을 보고 합격했어요.”
-다시 시작하는 공부가 힘들진 않았나.
“힘들었죠. 공부하기가 너무 싫었어요. 원서는 모국어(프랑스어)가 아닌 영어, 강의는 한국어로 돼 있었거든요. 한자도 많이 나오고. 정말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어요. 그 친구들과 예습, 복습을 같이 했어요. 그렇게 1년 반이 지나니 조금 수월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국가시험에 합격해서 의사가 됐죠.”
-전공을 가정의학으로 정한 이유는.
“전진상 의원에서 봐야할 환자들의 병의 종류는 정말 다양해요. 그래서 특정 분야를 선택하는 것보다 가정의학을 공부하는 게 더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팀원들도 모두 가정의학을 추천해줬고요.”
의사 국가고시를 합격하고 가톨릭대학교 병원에서 가정의 전문과정을 3년간 수련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기까진 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녀에게 전문의 자격증은 그 무엇보다 감격스런 일이었다.
-전문의가 되려면 학부와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평균 10년 정도가 필요한데 단기간에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당시 가정의학과는 인턴과정이 필요 없었어요. 지금은 인턴, 레지던트까지 마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저는 학부도 편입하고 인턴생활도 안했으니 토끼처럼 잘 건너뛴거죠(웃음).”
-전진상 의원에서는 특이하게 진료실 외에 상담소를 운영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전임 상담원이 세 분 계신데 환자들이 처음 내원하면 먼저 그분들에게 가서 상담을 받아요. 그리고 다방면으로 문제를 파악한 후 진료를 시작하죠. 예를 들면, 심각한 정신분열증이 있는 환자의 집은 집안 전체가 멈춰요. 모두 이 환자에게 붙어 있어야 하니까요. 대신 저희가 그 부분을 맡으면 가족이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 수 있잖아요. 오로지 병만 고치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사회복지를 병행하며 접근해야 환자도 살리고 그 가족도 살릴 수 있어요.”
-지금은 의료보험제도가 생기고 예전에 비해 환자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왜 이런 활동을 계속 하는가.
“영세민들은 의료수급자 카드가 있어도 큰 병원을 못가요. 호텔처럼 세워진 병원에 한 번은 가도 그 다음은 못가거든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검사는 한도 끝도 없이 많고 그에 따라 경제적 부담이 많이 되죠. 그렇게 뒷걸음질 쳐 다시 우리병원으로 오게 되는 거예요. 저는 힘든 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분들을 치료하는 건 제 몫이죠.”
-전진상 의원에서 모든 병을 다 고칠 수는 없지 않은가.
“상주 의사는 두 분, 그 외에 자문 의사는 35분 정도 계세요. 평일엔 저를 포함한 상주 의사가 진료를 하고 더욱 전문적인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자문 의사 선생님들이 주기적으로 오셔서 봐주시죠”
-자문 의사들은 돈을 받고 진료를 해주는 건가.
“자문으로 오시긴 하지만 돈은 받지 않으세요.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치료해주시는 것이니까 봉사의 개념으로 도와주시는 거죠.”
-전진상 의원은 돈이 있는 환자들에겐 치료비를 받고 없는 환자들에겐 무료로 진료를 해준다. 진료비와 치료비는 어떻게 감당하나.
“전진상 의원 수입의 절반은 의원 자체에서 발생해요. 나머지는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요. 돈을 낼 수 없는 환자들은 상담소에서 사회사업가나 후원회 쪽으로 연결을 시켜줘요. 그렇게 도움을 받아 치료를 할 수 있는 거죠. 의원 자체에서는 병원비를 할인해 준다거나 무료로 해줄 수 없거든요. 불법이니까요.”
-그렇다면 직원, 의사들은 월급을 받는 건가?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 22명이에요. 의사, 약사, 상담사, 직원 등. 모든 직원은 월급을 받아요. 액수는 원칙적으로 똑같죠. 단지 얼마나 오래 일했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요. 의사 월급 따로, 직원 월급 따로 차등을 두는 건 아니에요.”
-직접 왕진도 다니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많아서 한 달에 2번 정도는 차량 봉사자가 환자를 모셔오고, 그것도 힘드신 환자분들은 제가 직접 왕진진료를 나가요. 오늘 아침에도(3월 22일) 왕진을 다녀왔어요.”
-하루 종일 환자 진료에 왕진까지. 힘들진 않은가?
“왕진가는 날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날이에요. 환자들이 바닥에 누워있으니까 저도 같이 기어 다니죠(웃음).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할머니잖아요. 기운이 많이 모자라요.”
-이런 헌신적인 삶에 원동력이 있다면.
“힘이 들지만 그래도 환자들을 볼 때 제가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을 유지하면서 남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그럴 때면 저는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걸 느껴요.”
-한국에서 40년을 계셨는데 가족들이 그립지는 않은가.
“체력 때문에 힘든 건 견딜 수 있겠는데 그리운 마음은 어떻게 하질 못하니 힘들어요. 예전에는 2~3년에 한 번씩 벨기에에 갔었는데 요새는 6개월에 한 번 꼴로 가요. 어머님이 95세신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요. 큰언니도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드물거든요. 가족들이 많이 보고싶죠.”
-배현정이란 이름이 어색하진 않은가.
“40년을 배현정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요. 갑자기 길을 가다가 누가 제 본명(마리헬렌 브라쇠르)을 부르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요(웃음).”
-파란 눈의 천사, 시흥동 슈바이처, 벽안의 천사 등 수식어가 많다. 가장 마음에 드는 별칭이 있다면.
“내가 과연 천사인가. 이건 거짓말이죠(웃음). 그리고 제 눈은 아무리 봐도 갈색이고요. 이것도 거짓말이죠. 슈바이처는 저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사셨던 양반이에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창피하죠(웃음).”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생각인가.
“좋은 질문인데 답이 없네요. 지금은 제 생활에 여유가 없어요. 환자만 보는 활동이면 기쁜 마음으로 하겠지만 다른 잡일도 많거든요. 얼른 상주 의사가 더 많이 오셔서 제 일을 덜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월급은 얼마 안되지만요.(웃음)”

 

▲ 1972년에 배현정 원장이 직접 찍은 시흥동 판자촌.

 

 

 

 

 

 

 

 

▲ 1985년 중앙대 졸업식. (맨 오른쪽이 배 원장)

 

 

 

 

 

 

 

 

▲ 1999년에 명예시민증을 수여받고 있는 모습.

▲ 왕진 진료를 나가 환자를 보살피고 있는 모습.

배현정(67)= 벨기에 Charleroi Saint Joseph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Saint Joseph 병원 내과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1972년 내한 후 중앙대 의대 79학번으로 편입했다. 후에 국가고시에 합격,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전진상의원에서 상주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직 이중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국적은 벨기에지만 한국 영주권은 획득했다. 96년에 제 2회 의와 참의 중앙 의료인상을, 2009년 제21회 아산상 대상을 수상했다.

전·진·상 의원은 …
이곳엔 환자도 의사도 없다. 가족만 있을 뿐이다. 삶의 여정을 함께 하는 곳. 전·진·상 의원이다. ‘전진상’은 온전할 전(全), 참 진(眞), 항상 상(常) 자로 국제가톨릭형제회 정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의 기쁨을 의미한다.
1975년, 서울 시흥동의 37평 남짓한 주택에서 전진상 가정복지센터로 출발한 전진상의원은 어려운 사람에게 봉사하며 살자는 사명을 내걸고 37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진료를 이어오고 있다. 또 매주 목요일은 몸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상주 의사가 직접 왕진 진료를 다니며 환자 사랑을 실천한다.
전진상 의원은 가정 내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의료사회사업까지 병행하고 있다. 환자와 가족의 빈곤을 해결하는 것 또한 전진상 의원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의료차트를 가족단위로 등록한다는 점은 전진상 의원만의 독특한 환자관리 방식이다.
개원 당시 구성원으로는 배현정 간호사와 약사, 사회복지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봉사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현재 전진상 의원은 배현정, 정미경 가정의학과 전문의와 간호사, 약사 등 6명의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 50명의 자문의사, 1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다.
1996년부터는 완치가 불가능한 환자를 위해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시작했다. 호스피스 완화 치료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환자와 그들의 가족까지 전적으로 돕는 치료 활동이다. 배현정 원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가 아프지 않고 행복해 할 수 있도록 다 같이 힘을 모은다. 언제나 이별을 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지만 우리의 일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2008년에는 본격적으로 전진상 의원 내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시와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전진상 의원을 호스피스 전문 의료기관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10개의 병상을 갖춰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며 외래 진료와 입원 등 각종 의료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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