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학기 민병일 선생님의 민주주의론 수업을 들었다. 매주 읽을거리가 있었고, 교수님께선 우리가 ‘읽었다’는 전제 하에 질문을 던지며 강의하셨다. 그러나 교수님의 바람과 달리 안 읽어 오거나(읽을거리가 어려운 탓에) 이해를 못한 경우가 많아 우린 자주 침묵했다. ‘읽었다’는 전제가 ‘읽지 않았다’는 의심 혹은 확신으로 바뀔 경우 돌발퀴즈가 등장했으므로 한 학기 내내 공포 속에 지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우린 퀴즈를 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대답을 하자’는 암묵적 합의를 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추상적이고 겉도는 식의 답이 많았다. 그때마다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좋은 답변엔 2차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교수님의 말씀은 신문에도 적용될 것 같다. 우린 왜 신문을 읽을까. 아마 정보습득이 핵심일 것이다. 그런데 독자가 신문을 읽다가 “어? 근데 이건 어떻게 되는 거지?”라며 물음표를 그린다면 충분한 정보를 제공했다 자부할 순 없을 것이다. 독자는 2차 물음보다 느낌표를 원한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1761호의 ‘소통 없이 소음대책 마련하다 잡음 생겨’ 기사는 조금 아쉽다. 학생지원처가 “모든 동아리에 연락을 주기 어렵다”고 했는데, 학교 공지는 SMS, 메일로 전교생에게 잘 알리면서 왜 그게 동아리엔 안 되는지 물어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총학생회 중재로 동아리 측과 학생지원처가 협의해 문제를 해결한다 했는데 이밖에 학교차원에선 방음강화나 장소이전(학습권을 위한 일이라면 번거롭고 비용이 든대도 장기적으론 괜찮지 않을까) 등의 계획이 없는지 물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신문의 문제제기는 문제해결을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문제 속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중대신문이 독자를 대신해 묻고, 또 물어줬으면 한다.

권중혁 학생(사회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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