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사냥감이 된 이유는
그 가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 잘하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시달리는 이유는?”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 차렸겠지만, 지난 주 중대신문은 학술면이 통째로 ‘편집’되었다. 신문사 내부의 구체적인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부총장 인터뷰 특집에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없는 학술 기사들이 밀린 듯 보인다. 일반 서점가에서도 ‘진지한 글쓰기’보다는 ‘강의형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휩쓸고 있는 현실에서, 편집자가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수의 강의를 평가하면서 ‘재미’나 ‘실용’을 제일 기준으로 삼은 지 오래이니,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노자와 함께 도가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 장자(莊子)의 저서엔 다음과 같은 우화가 나온다. “도목수 석(石)이 제나라 곡원을 지날 때, 큰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그늘에 수천 마리 소가 누울 수 있고, 넓이는 백 아름이나 되었다. 그 줄기는 산처럼 높아, 배를 만들 수 있는 가지가 수십 개나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석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지나가 버렸다. 그 제자가 물었다.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보시기조차 안 하시니, 어떤 까닭입니까?’ 석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쓸모 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 앉고, 관(棺)을 만들면 빨리 썩는다. 그릇을 만들면 망가지고, 문이나 창을 만들면 나무진이 흐른다. 기둥을 만들면 금세 좀이 슨다.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산 것이다.’” 얼마 후 잠이 든 도목수의 꿈에 나무의 신이 나타나 이렇게 묻는다. “나는 오랫동안 쓸모 없게 되기를 바래왔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금 이 경지에 이르렀다. 나에게는 이것이 ‘큰 쓸모(大用)’이다. 만일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이렇게 클 수 있었겠는가?” 상수리 나무가 자신을 보전하고, 사방의 생명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특정한 쓰임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랑이나 표범이 사냥감이 된 이유는 그 가죽이 아름답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원숭이를 쫓는 이유는 그들이 재주를 부릴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일을 잘 한다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시달리는 것은 그가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얼핏 똑똑해 보이지만, 막상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삶의 본 모습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용적인 지식은 남에게 부림을 받을 때는 필요할 지 모르지만, 막상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일에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도구적 지식은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미 있게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처럼 불안과 경쟁에 시달리게 된 것은 “‘유용한 것의 쓰임(有用之用)’만 알지, ‘무용한 것의 쓰임(無用之用)’은 알지 못한” 데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대학 교육에서조차 ‘효율성’을 강조하며, 수치화된 상대평가로 경쟁을 부추긴다. 장자는 “유한한 나의 생명으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니 위태롭다”라고 하였다. 생명의 활력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를 보존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대답이 쉽진 않지만, 유용성에 기반한 지식이 그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깊은 사색과 성찰, 그리고 ‘유용’과 ‘재미’를 넘어선 데 있을 것이다. 적어도 대학 사회만큼은 진지한 학술 문화의 복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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