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사용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 납작한 마법상자의 민첩한 영리함이 마냥 신기하고 대견스럽다. 허나 짓궂은 녀석의 시도 때도 없는 간섭과 투정이 꽤나 귀찮고 경망스럽다. 그리고 차츰 두렵다. 갈수록 내가 뉴미디어를 ‘휴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애물단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한다는 의혹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주종(主從)의 역전이 무섭다. 우리의 일상과 행동방식과 (무)의식을 숨 가쁘게 재편하는 이 작은 거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글은 한 인문학자의 스마트폰(이하 SP) 사용후기이다.  

  첫째, SP는 산만과 집중의 통섭을 실현한다. 우선 SP는 심심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총천연색 볼거리가 눈길을 붙잡고 고음질의 디지털사운드가 귀청을 울린다. 온갖 정보가 쇄도하고 스팸메일이 기습한다. 트위터는 지저귀고 카톡은 재잘거린다. 정보의 포식으로 눈과 귀는 피곤하고 손은 분주하다. 요컨대 디지털시대 인간은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발터 벤야민)이다. 동시에 SP는 ‘순간 집중력’을 훈육한다. 거리에서, 지하철 안에서, 수업시간에 새끼손톱보다 작은 자판을 정확하고 집요하게 두드리는 고도의 주의력을 보라. 산만한 집중! 이 모순적 정신상태가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한 번잡함이 창조적 상상력을 잉태하지 못하고, 찰나의 집중이 진득한 성찰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컷컷컷! 신속하게 다음 장면으로 질주하는 조건반사적 인지모듈이 자기반성적 독서체험을 교란하고 있다.

  둘째, SP는 소통을 촉진하면서 소통을 방해한다. SP는 시공간의 제약없이 주체와 타자를 수평적으로 연계한다. SNS의 광장에서 SP가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문화적 파급력을 보라. 하지만 개인을 단자로 소외시킬 위험성도 다분하다. SP만 곁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낄 틈조차 없다. 또한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와 알림음은 면대면 의사소통의 리듬을 무시로 끊는다. 강의실 책상 밑에서 SP 위를 기민하게 유영하는 손가락은 교수와 학생 사이에 ‘딴전의 장벽’을 쌓는다. 내가 가상의 존재와 대화하기 위해 잠깐 SP를 보는 순간, 내 앞에 엄연히 실존하는 파트너와의 관계는 일시 중단된다. 소통의 과잉이 소통의 정체를 양산하는 꼴이다. 점점이 흩어진 사람들을 광적인 속도로 네트워킹하는 SP가 동시에 인간관계의 단절을 낳는 이상한 가역반응!

  셋째, SP는 ‘메시지’이자 ‘마사지’이다. 매체철학자 마샬 맥루한이 옳았다. 이제 SP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메시지 그 자체이다. SP는 정보의 콘텐츠가 수집, 분석, 저장되는 지각의 연장, 즉 제2의 자아로 승격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SP 이용자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의 하비투스를 내면화한다. SP는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전도사인 것이다. 또한 SP는 현대소비사회의 욕망이 집적된 물신(物神)이다. 연인을 애무하듯 매순간 스타카토 주법으로 톡톡쓱쓱! 나는 두드린다, 고로 존재한다(Tactus, ergo sum). 바야흐로 촉각이 사유에 선행하고 속도가 본질을 규정하는 감각의 제국이 도래했다. 싫든 좋든, 똘똘한 폰이 왔다.

류신 유럽문화학부 교수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