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위학은 양적 지식 위도는 질적 지혜”
경험 쌓기에서 나아가 내면에 주목하자

 거문고는 오동나무로 만든다. 오동나무는 조직이 치밀하지 못한데다,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악기 재료로는 적합하지 않은 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동나무를 쓰는 이유는 거문고가 추구하는 소리가 음량보다는 그 남는 소리, 여운(餘韻)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올린이 가문비 나무로 만들어져, 높은 음역과 화려한 소리를 자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거문고 소리를 들을 때는 공명이 잘 되는 연주회장이나 스튜디오보다는 대청 마루 넓은 한옥에서 들을 때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악기로서의 효용보다는 그 소리 뒤에 남는 소리(遺音)를 느끼는 것이 거문고를 제대로 듣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유학과 더불어 한 축을 이루는 도가철학의 창시자 노자는 천하의 학문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즉 ‘학문을 하는 것(爲學)’과 ‘도를 추구하는 공부(爲道)’로, 양자의 차이는 “위학이 날로 늘려가는 공부인 데 비해, 위도는 날로 덜어간다(爲學日益, 爲道日損)”는 데 있다.(『도덕경』, 48장)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문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 크게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구분이 있고, 전공별로 그 영역이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다. 여기에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은 모두 ‘늘려가는’ 공부에 속한다. 이에 비해 위도는 개별적 사물과 경험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든 사물과 사건의 근본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를 안다는 것은 여러 잡다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나뭇가지와 나뭇잎보다는 그 뿌리를 보아야 하듯이 말이다.  
 어떤 학문이 ‘위학일익’의 학문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지만, ‘위도일손’에 속하는 학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대학에 들어오기까지 해온 입시공부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공부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의 교과과정이 전문지식의 전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성취 여부를 계량화된 지표로 평가하는 풍토에서 이런 현실이 바뀔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다만, 어떤 사람이 전문적인 지식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대답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탁월한 논문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 부도덕한 일을 서슴치 않고, 천박한 언행을 일삼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경험적 지식은 ‘양(量)’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 그것이 그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고상하게 담보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선, 외부 세계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공부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사람의 마음은 숱한 사건들과 부딪치면서 흔들리고, 사람의 본성은 감정과 욕망으로 항상 먼지가 끼게 마련이다. 이처럼 분산된 마음과 먼지 낀 본성으로는 사물이나 사건의 근본 도리를 알 수 없다. 우리가 도를 밝히고, 그와 하나가 되기 위해선, 경험적 지식 너머에 있는 지혜와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공부는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반성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노자가 지식에 대해 “남을 아는 것은 지(智)라고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연도 교수(교양학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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