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부터 행정직제가 일부 개편됐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관. 바로 ‘인권센터’다. 국내 대학으로는 최초로 설립된 중앙대 인권센터는 기존 성평등상담소와 더불어 인권상담소를 운영한다. 그 중심에는 이나영 사회학과 교수가 있다. 성평등상담소가 인권센터가 되기까지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한창 바쁜 시기임에도 전화 한 통에 흔쾌히 인터뷰를 허락했다. 그녀의 첫 인상은 ‘쿨(cool)’. 그 자체였다. 

약속시간이 되어 학생회관 2층 인권센터로 향했다. 몇 배로 확장된 센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웬걸. 학생지원처 맞은편에 자리 잡았던 성평등상담소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현판과 안내판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인권센터로 바뀌었는데 변한 게 없다.
“현판식도 못했어요(웃음). 직원만 급하게 1명을 추가로 받았어요. 아직 시작단계라 뭘 할 여력이 안되요. 이제 하나씩 해나가야죠.”

인권센터 미리보기

-국내 대학으로는 최초로 인권센터가 세워졌다.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작년 성평등상담소에서 처리한 46건의 상담 중 33%가 성과 무관한 문제(인종차별, 근로 등)였어요. 이러한 일들로 상담소를 찾는 학생들이 점차 많아지다보니 포괄적으로 인권문제를 다루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성평등상담소가 학생지원처 소속으로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보고체계가 복잡했고요. 어떤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쳐야했죠. 그렇다보니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여러 차례 본부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고 다행히 학생지원처장님과 기획처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주셔서 전격적으로 인권센터로 확장하게 됐어요. 우연성과 필연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죠.”
-얼마나 준비했나.
“제가 준비한 것은 없어요. 어떻게 보면 학내 구성원이 준비가 됐던 것 같아요. 우리학교 성희롱 예방교육 시스템은 전국 1등이에요. 2009년부터 교수는 일 년에 2차례, 직원은 특정 날짜를 정해 반드시 예방교육을 받게 되어 있어요. 학생도 올해 신입생부터는 모든 계열에서 성평등 교육을 진행해요. 처음에는 ‘우리가 잠재적 가해자냐’는 반발이 있기도 했죠. 하지만 3년 정도가 지나니 매년 맞아야 하는 예방주사라는 의식이 생긴 것 같아요(웃음). 그 결과 중앙대 전체 구성원들의 인권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한거죠.”
-성평등상담소와 인권센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체 구조로 보면 일단 인권센터 산하에 성평등상담소와 인권상담소가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는 장애학생인권상담소도 만들 예정이고요. 성, 인권,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새로 생긴 것도 기존과 다른 점이죠. 가장 큰 차이점은 총장직속기구로 바뀌었다는 거죠. 독립성과 권위가 생겼어요. 사건을 보면 학생간의 문제도 있지만 교원과 학생, 외부인과 학생의 문제도 많거든요.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기구가 학생지원처 밑에 있으면 안돼죠. 총장직속기구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전에는 학생지원처 소속이기 때문에 처리하지 못했던 일이 많았나.
“처리했죠. 제가 누구에요(웃음). 약간 어려움이 있었을 뿐이죠.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을 2중, 3중으로 거쳐야 했으니까요. 지금은 제가 전화 한 통만 하면 해결돼요.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편리하죠.”
-학생지원처에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된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물론이죠. 아까 학생지원처에 있어서 불편했던 점들을 얘기했는데 오히려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인권센터가 세워진 이후 기성 언론에서 여러 차례 취재요청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중앙대 인권센터가 학내에서만큼은 국가인권위원회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국가위원회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니?
“국가위원회는 조사를 거쳐 권고 정도의 조취를 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중앙대 인권센터는 행정집행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어요. 사건이 발생하면 대책위원회에서 조사위원회를 꾸리죠. 조사를 거쳐 조사위원들이 대책위에 결과를 보고하면 교원의 경우 징계위원회, 학생의 경우 상벌위원회를 열어 징계를 내려요. 대책위원은 신고인별로 다른데 학생인 경우 학생지원처장, 교원인 경우 교무처장, 외부인인 경우 행정지원처장이나 기획처장이 위원으로 구성돼요. 사안별로 대책위원회가 열리기 때문에 사건처리가 신속하고 절차가 투명할 수밖에 없죠.”
-아직 인권센터는 걸음마 단계다. 힘들거나 어려운 점은 없나.
“많죠. 수도 없어요.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전임연구원 문제에요. 이 많은 사건들을 처리하는데 4명이서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죠. 아직도 성평등상담소 업무를 보고 있어요. 직원 선생님이 저녁 11시에 퇴근하세요. 모두들 과부하가 걸린 상태에요. 그러고 보니 전임연구원이 오신다고 해도 막상 앉을 자리가 없네요. 공간문제, 인력문제가 가장 시급해요.”
-인권센터 첫 사업은 어떤 것이 될 것인지 궁금하다.
“일단 5월에 인권캠페인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성평등문화제에서 인권문화제로 확장해야겠죠. 아직 주제는 안 나왔지만 외부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문화제를 할 계획이에요.”
-인권센터 최종 목표가 있다면
“한 마디로 말하자면 ‘행복한 캠퍼스 구현’이죠. “나 중앙대 다닌다”하면 적어도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괜찮은 학교라는 평을 듣고 싶어요. 성매매, 성교육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났거든요(웃음). 또 한 가지 작은 바람이 있다면 성평등상담소가 이나영으로 대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처음부터 만들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권의식이 중앙대 구성원들의 일상의 문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나영 다시보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베일에 쌓인 교수님의 나이를 궁금해 한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요(웃음). 오늘이(15일) 사실은 제 생일이에요. 대학원생들과 간담회 형식으로 점심식사를 같이 했는데, 우리 학생들은 마흔 살 이후로는 제 나이를 세지 않아요. 케익에 초를 4개만 딱 꽂았어요. 전 86학번이에요. 나이는 한 살 적어서 68년생입니다. 아 이건 밝히면 안 되는데(웃음).”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인기가 많았었죠. 사실 제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패션디자인을 하려고 했어요. 천을 사다가 옷을 만들기도 하고 찢어서 붙여 입기도 하고 그랬죠. 배우 신현준이 저랑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는데 그 친구랑 저랑 장난 아니었어요. 그 친구는 짝짝이 양말, 짝짝이 신발 신고 저는 큰 귀걸이에 머리도 미친 사람처럼 풀어헤치고 다니고. 유명했죠.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해봤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런 걸 다 해봤기 때문에 학생들의 자질이 다 인정돼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거든요.”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운동권이 아니었으니까요. 화장도 하고 다녔고요.”
-운동권이 아니었다니?
“우리 때는 시위가 일상이었어요. 학교 들어가다가 시위대가 형성되면 뒤에 줄서서 구호 외치고 그랬죠. 지금처럼 특별히 운동권이 하는 활동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아주 열심히 참여한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대학원 때 운동권이었죠.”
-대학원 때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학원생 운동권은 굉장히 드물죠(웃음).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학교가 워싱턴 근교에 있었어요. 제가 있을 때가 부시 행정부였고 9.11테러가 났었죠. 저는 그때 한국계 미국인이 만든 조직에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저는 청와대보단 백악관 앞에서 데모를 많이 했네요(웃음). 지금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무것도 모를 때 남에 의해 운동을 한 게 아니고, 제 삶의 경로와 다양한 만남을 통해 의식화가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문과 출신인데 대학원에선 여성학을 전공했다. 여성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사실 제가 결혼을 한 번 했었어요. 23살에. 미국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서 유학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결혼을 하면 유학을 허락해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으시길래 없다고 답했더니 바로 저를 선시장에 내놓으신 거예요. 선 자리에 나가서 딱 한 가지만 물었어요. “제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딱 한 사람만 “예”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그 사람과 결혼했죠(웃음). 하지만 결혼을 해보니 누구 엄마, 몇 호 아줌마, 며느리. 이렇게만 불리더라고요. 자기 존재가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때 ‘내가 누구일까’란 질문을 처음 했어요. 그래서 여성학을 선택했어요. 그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 여성학이었거든요.”
-여성학을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았나.
“네. 공부를 하면서 제 모든 믿음체계가 다 깨졌어요. 마치 종교를 새로 만나는 듯 한 느낌이라고 할까? 제가 가진 질문이 사실은 이미 많은 여성들이 던졌던 것이더라고요. 100년 전에 한 여성이 공장에서 이미 그 질문을 했고, 6~70년대에 같은 이유로 인해 여성학과가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 학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즐거운 것, 잘하는 것(패션디자인)을 하려고 했지만 내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고 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학문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인 것 같아요.”
-여성학이라는 분야가 한국에서 잘 알려진 학문이 아니었다.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미국은 우리와 달라서 학부에 여성학이 없는 학교가 없어요. 석사에서만 60~70개의 과정이 있고 박사과정도 열려 있어요. 주변 사람들은 당시 한국에서 각광받던 언론정보학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라고 권유했지만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죠. 신앙과 같은 존재를 만났는데 어떻게 버릴 수 있었겠어요.”
-진로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제 목표는 세상이 좀 더 공정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자리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다 보면 우연히 만나는 거지 그게 목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큰 고민은 없었죠. 공부는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아침에 눈 뜨면 도서관에 가서 밤 12시까지 공부했어요. 평일에는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주말에는 조직(학생운동)에 가는 거죠(웃음). 토요일엔 데모를 하고 일요일부터는 다시 공부하고 그랬죠.”
-미국 생활로 얻은 것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없다는 거예요. 무서운 게 뭐가 있겠어요. 경찰과 늘 대치하는데(웃음). 그때 인생의 멘토들도 많이 만났죠.”
-평소 권력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만약에 학교를 그만두면 제가 포장마차를 못 하겠어요? 식당을 해도 잘할 것 같아요. 단체를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 가장 비굴해질 때는 자리에 연연할 때거든요. 저는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좌파라고 차별 받는다”는 소리도 하셨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저 좌파에요?(웃음)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대한민국 좌파는 모든 측면에서 진보라고 보긴 어려워요. 어떤 측면에선 보수적인 부분도 많죠. 그리고 저는 남들이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주변 교수님들이 제가 전화하면 덜컥 겁부터 먹는다고 해요.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하는 줄 알고.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썼으면 이 일 못해요.”
-강단에서의 이나영은 언제나 당당하고, 진보적이다. 인간 이나영은 어떤가.
“똑같아요. 별로 유머감각이 없어요. 주은우 교수님처럼 유머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늘 긴장상태에 있어요. 술 마실 때는 다르지만(웃음).”
-술을 굉장히 잘 마신다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갖는 술자리를 즐겨요. 제가 술을 잘 마시는 줄 몰랐어요. 유학가서 그 조직에서 알았죠. 술이 안취하더라고요.”
-좋아하는 술이 있나.
“제가 소주와 맥주를 안 좋아해요. 소주는 맛이 없고 맥주는 제가 장이 안 좋아서 마시면 배가 아파요. 그래서 소맥을 먹어요. 물론 학생들에게도 따라주죠. 맛있게 먹으라고.”
-본인도 느끼겠지만 여성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교수님의 팬이 되더라. 학생들이 교수님을 잘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런가요? 너무 감사하네요. 제가 하는 일이 많아요. 인권센터, 사회학과 학회, 수업 연구에  논문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그래서 저에겐 수업이 오아시스처럼 느껴져요. 처음 강의실에 들어갈 땐 지쳐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학생들의 에너지를 받아서인지 훨씬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특히 1학년 학생들 수업에 들어가면 아이들 눈빛이 초롱초롱해요. 그 아이들은 마치 백지 같아요. 거기에 제가 그림을 그리면 되는 거예요. 그게 행복한거죠. 물론 제가 카리스마가 있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학생들이 절 좋아한다면 제가 학생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웃음).”
-그렇게 바쁘게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 중에 한 명이 묻더라고요. 선생님 왜 그렇게 사시냐고. 세상을 바꾸려면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제게 주어진 책무를 회피하진 않아요. 물론 제 일이 아니라고 느끼면 거절도 하죠. 하지만 제가 꼭 필요하고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많겠다고 느끼면 다 받아요. 그러다보니 일이 많아졌죠. 여러분들이 많이 성장해서 제 일을 도와주세요. 씨는 제가 뿌려놀테니 그 씨앗을 잘 가꿔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나영(45)= 개그콘서트 ‘사마귀 유치원’과 드라마 <시크릿가든>을 좋아하는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과 여학생들이 여성운동 한답시고 외모 가꾸기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것을 가장 안타까워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항의 리(Lee)’로 불린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장래희망은 패선디자이너였다. 동대문 가서 천을 떼다 옷을 지어 입는 게 취미였다. 패션디자인 공부를 위해 홍대 앞으로 60만원(지금의 250만원 정도)을 지불하며 개인 교습을 받았다. 23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일찌감치 ‘누구 엄마’, ‘몇 호 아줌마’로 불리며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학을 만났다. University of Maryland, College Park에서 여성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수업에는 ‘집회에 참가하기’라는 활동이 있다. “대학 때 안하면 언제 해보겠냐”는 그녀의 말에 실천하는 지성인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내가 아는 이나영 교수

박상규 기획처장(응용통계학과 교수)
“이나영은 굉장히 정확하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공식적인 일을 같이 한다. 그녀를 보면 열정이 느껴진다.”


노영돈 교수(유럽문화학부)
“굉장히 합리적이며 잘못된 관행을 보면 참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존재 자체가 바쁜 사람이다. 밥 한 끼 같이 먹을 시간이 없다.”

 

김경희 교수(사회학과)
“그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충전이 절대 필요 없는 에너자이저.”


이민아 교수(사회학과)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지만 내면은 따뜻한 사람. 그리고 때로는 귀여운 면도 많은 사람.”

 

주은우 교수(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전투적 페미니스트다.
  신념에 가득 찬 페미니스트.”


민경란 사회학과 조교
“학생들을 많이 배려해주신다. 특히 취업 시 추천서를 잘 써주셔서 학생들이 연락을 많이 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쿨한 여자.”


설진영 학생(사회학과 2)
“곧게 편 허리에 우리를 직시하는 시선처리, 활짝 웃는 표정, 그리고 당당함. 교수님의 첫 인상이었다.”

 

이지윤 학생(사회학과 3)
“수업 시간에 내뿜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다. 절대 졸 수 없는 수업!”

황미나 학생(사회학과 2)
“같이 위안부 1000회 집회를 갔었다. 학생인 나보다 활발하게 방방 뛰셨다. 교수라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순수함과 소탈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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