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앙대생들이 민족자결권을 행사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거리행진은 과거 20대 정치 참여활동의 주된 활동 중 하나였다. 중대신문 자료사진

 

해방과 민주화, 과거 20대는 정치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오늘, 자기계발에만 몰두하는 20대는 정치적 이방인이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세대’의 주축를 이루고 있는 20대의 정치참여는 역사적으로 그 유서가 매우 깊다. 일제 시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20대의 정치참여는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목표와 방식을 달리하며 변화되어왔다.

일제 시대: 민족해방 투쟁의 선도
  일제 시대에는 ‘조선인’을 철저히 억업하고 배제하고 수탈하는 식민지적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해방’을 목표로 투쟁하였다. 참여 방식에 있어서도 시위와 봉기, 무장투쟁 등과 같은 ‘비합법적이고 비제도적’인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는 친일파 혹은 협력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정치·사회적 자유와 권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언론사도, 기업도, 대학도 마음대로 설립할 수 없었다. 20대를 포함한 청년세대 정치참여가 3.1운동-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 등의 사회운동적 저항 혹은 조선청년총동맹-혁명적 노조 및 농조 건설 등과 같은 ‘비밀결사식’ 조직형태로 나타났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승만 민간독재 시기: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 운동의 선봉
  해방 이후 극심한 이념대립과 전쟁의 와중에 등장한 이승만 ‘민간독재’ 시기, 20대의 정치참여는 4.19 혁명을 가져왔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폭정과 실업율이 30%를 넘는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민중들의 분노가, 부정선거와 폭력적 탄압에 항의하는 청년 세대의 봉기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 바로 4.19혁명이다. 4.19혁명 이후 20대 청년들은 민족통일을 중대 정치의제로 설정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분단으로 인해 좌절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수행코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통일운동은 국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살육’으로 점철된 이념대립과 전쟁을 겪은데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민족통일을 목표로 한 20대의 정치참여는 오히려 ‘또 다른 독재의 시대’를 여는 빌미를 제공하고만다. 강력한 반공주의를 기치로 정치·사회적 혼란과 경제난을 해결하겠다는 군부세력이 5.16 쿠테타를 일으킨 것이다. 박정희 군부독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군부독재 1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재점화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에 20대,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제도적 방식의 정치참여가 왕성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 반대를 필두로 하여, 반독재 민주화를 목표로 3선개헌반대, 유신체제 반대 운동 등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퇴학과 제적으로 대학생 지위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투옥되고 심지어는 목숨마저 잃는 등 대학생들의 희생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대학생들은 고도성장의 역군과 희생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몫을 분배받지 못한 노동자들과 농민, 빈민들의 권익향상이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군부독재 2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꿈꾸다 
  20대 청년들은 1980년대 들어 정치참여의 강도를 더욱 높여 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내부의 권력 다툼과 정권 위기 대응방식을 둘러싼 갈등 끝에 붕괴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다시금 쿠테타를 통해 독재정권의 시대를 연장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20대 정치참여의 가장 큰 특징은 목표와 방식이 보다 근본적이고 전향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위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실천이 이루어졌다. 변혁의 주력군으로 노동계급을 조직하기 위해 대학생의 신분을 버리고 직접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의 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이를 ‘존재 이전’이라고 불렀다. 거리 시위가 더욱 활성화되었고 분신 자살 등 극단적인 자기 희생마저 등장했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정치참여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초 군부독재 세력과 보수정치 세력의 타협과 주도로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수준에서 민주화 이행이 이루어지던 독재정권 말기-노태우 정권 시기-에도 계속 되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법과 제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 등에 대한 억압과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IMF 위기 이후: 정치로부터의 퇴각 
  1990년대초까지 한국 사회가 20대 청년 대학생들의 정치참여를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국가권력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공정사회의 건설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며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특히 IMF 위기를 거치며 그러했다. 20대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정치적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팽배해졌다. 비제도적 참여는 물론, 투표 참여마저도 타 연령 및 세대층에 비해 바닥 수준인 20%대로 떨어졌다. 대한민국의 역사과정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가장 활동적이었던 ‘20대 정치 주체’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20대 청년세대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적 주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0대 청년들은 더 이상 집합적 주체가 아닌 개인으로 원자화되었고, 결국 20대의 정치참여를 이끌었던 이러 저러한 조직과 단체, 모임, 그 속에서 형성된 신뢰 등과 같은 ‘사회 자본’이 소멸되었다. 시대 현실에 걸맞는 집합적 가치와 목표와 정치참여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기로에 선 20대
  고액등록금과 실업, 부당한 처우, 속물이 되었다는 조롱, 상품화된 위로와 격려와 조언, 기존 정치세력 주도의 ‘오디션식 공천’ 등은 20대가 더 이상 정치적 주체가 아닌 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이 사회가 스스로 정치 주체이지 못한 혹은 정치 주체여서는 안된다고 간주되는 자들을 괄시하고 취급하는 방식이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 20대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셈이다. 다시 정치 주체의 지위를 찾아 미래의 몫을 차지하기 위한 실천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계속 자기계발 주체라는 늪에서 괄시 받으며 지금의 몫만이 아닌 미래의 몫마저 포기할 것인지. 최근 19대 총선 출마를 앞두고 20대 출마나 정당참여에 눈길이 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과연 20대 정치참여의 시대는 다시 열릴 수 있을까….

김윤철 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정희진 기자의 참고서
시대를 구한 20대의 책임감

  오늘날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 삶에 치여 정치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다. 이런 점에서 기고문은 흥미로웠다. 과거 20대 정치참여가 보여준 의외성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과거의 청년 세대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유독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20대가 짊어져야 했던 책임감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20대를 제외한 세대는 정치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대다수 국민의 의식이 억압되었고 해방 후에도 6.25전쟁을 치르느라 여유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해야 했다. 정치 참여에 대한 거부 감정도 거셌다. 6.25전쟁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 전쟁이 이념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국민들은 ‘이념 운운하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대학생을 필두로 한 젊은 세대는 정치적 에너지가 충분했다. 당시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사회의 엘리트 계층으로 나아가는 보증수표를 얻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회 주체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사적 관심사보다는 거시적인 국가 문제에 힘을 쏟았다. 이 대학생들을 시작으로 새로운 사상이 젊은 층 전체에 유행처럼 퍼졌다. 젊은이들은 독서를 통해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 논하는 일을 즐겼다. 더욱이 눈앞에 놓인 취업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지금의 20대와 달리 과거의 그들은 여유가 넘쳤고 오로지 사상과 정치 문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상을 통해 20대가 바라본 한국 사회에는 부조리가 넘쳐났다. 겉으로는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듯 보였던 독재정권은 암암리에 권력 연장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경제성장을 기치로 들어선 군부정권은 독재를 자행했다. 사회의 부조리를 알아챈 유일한 세대였던 20대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리고 행동했다. 대학생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는 희생도 감수했다. 본문에 나온 ‘분신자살’은 당시 20대의 정치적 적극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과거 20대의 모습을 반추해보면 희망은 있다. 정치를 향한 열망은 20대에게 충분히 내재되어 있으며 그 열망을 발산할 잠재력도 충분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 ‘20대와 정치’를 주제로 5부작 기획이 이어진다. 기획을 통해 20대인 우리 스스로 정치적 열망을 회복하게 되길 바란다. 내재되었던 열망이 살아난다면 정치적 주체로서의 20대 부활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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