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해변가엔 소란스러웠던 욕망의 물거품이 파도에 쓸려가고 있다. 일상은 세금 통지서처럼 어김없이 찾아오고. 이제 캠퍼스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회 인사와 여행 무용담으로 왁자지껄해지고. 구릿빛 피부에 하얗게 빛나는 이빨들은, 그래도 젊음은 좋은 거라고 바캉스는 신나는 거라고 재잘대는 것 같다. 광란의 휴가는 끝났다고 가벼운 웃음으로 일상을 맞이하는데.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는 언제나 양면적이다. 지독하게 쓸쓸하거나 지독하게 즐겁다. 이 둘 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자들에게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따라온다.

영화 ‘나는 네가 여름에 한 일을 아직도 알고 있다’를 떠올린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여름의 한복판에 무언가 찜찜한 흔적들을 남기고 온 것은 아닐까. 공포영화가 대중의 억압받은 무의식과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진부한 공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분별하고 자제력을 잃은 욕망의 후유증을 읽어낼 수 있다. ‘13일의 금요일’에서도 익히 보아왔던 보수주의의 복수. 정상성과 겸손을 위반하는 욕망의 분출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기성계층의 단죄에 의해 일상 속에 함몰된다. 금기를 어긴 자는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심판관을 따라 단두대 위에 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화들의 경고는 마치 2학기 수강신청을 알리는 학사일정의 엄숙한 말투를 닮았다.

문학에 등장하는 여행은 주로 젊은이들의 내적 성숙을 도와주는 방랑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떠남이거나 과거를 매듭짓기 위한 영혼 순례이기 쉽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떠올려보자. 주인공은 서울이라는 일상의 세계를 떠나 ‘무진(霧津)’을 여행한다. 안개와 햇볕과 바람의 공간 무진에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함을 배우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강원도의 힘’의 두 남녀처럼 탈일상의 공간에서도 일상의 늪을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결국 일상의 세계에게 투항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모든 것이 다 이런 것 아닌가. 한 차례의 일탈은 결국 더 오랫동안 일상에서 버티기 위한 교활함이 아니던가.

송능한 감독의 단편영화 ‘소풍’에서는 한가족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이때 이들의 여행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소멸을 상징한다. 어린아이의 부모는 그렇게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바탕 일탈의 축제가 끝나고 난 뒤, 아직도 우리 곁에는 ‘소풍’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빈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부모를 떠나보낸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미래가, 우리들의 일상을 날카롭게 찢는 미완의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다음과 같이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희들이 지난 여름에 한 일을 모르고 있다.”

박 명 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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