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제협력단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을 수여받기 위해 네팔 의사 박철성 동문이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 평균수명 42세, GNP가 30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나라 인 네팔에 상주하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네고 있는 네팔의 슈바이처, 박철성 원장을 만났다.
 
“함께 나눌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니, 
한 번 빠지면 못 벗어나.
여생 의술 베풀며 살고파”
 
 
 
 
  “커피 한 잔이면 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데…”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네팔에 두고 온 환자들 생각뿐인 것 같았다. 단돈 400원이 없어 병원에 오지 못하는 네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하는 그다.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 믿고 오늘도 내일도 무의촌을 찾아다닐 것이라 다짐하는 그, 바로 박철성 원장이다.    
 
-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들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 어렵게 자랐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어릴적 고열에 시달리다가 소아마비를 앓았다. 다리를 절뚝거리니까 나는 늘 동네 친구들의 놀림 대상이었다. 때리고 도망가는 친구들도 있어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국인 선교사가 소아마비를 귀신같이 고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선교사가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어렵게 기회를 얻어 수술을 하게 됐고 보통 친구들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 어릴 때 받은 도움이 의사의 꿈을 키우게 한 동력이 된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내 다리를 고쳐준 선교사가 마치 신 같았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고 너무 위대해 보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의사의 꿈을 품었다. 사실 나는 공부를 못했는데 의대에 가고 싶어서 삼수를 했다(웃음). 공부하는 과정도 힘들고 어려웠지만 계속 도전했다.
 
-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평범한 의사생활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운영하고 있던 개인병원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2000년대는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혼란스러워 하던 시절이다. 그때 잠시 병원 문을 닫고 쉬고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다리 한 쪽을 마저 고쳐서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심에 어릴 때 수술 받았던 병원을 찾아갔다. 거기서 우연히 내 다리를 고쳐줬던 선교사의 소식을 듣게 됐다. 케냐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80살의 늦은 나이에도 봉사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소식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아, 나는 어린 시절 다짐했던 것들을 잊고 지냈구나’ 반성하면서 그때부터 나도 봉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부모님도 그렇고 친구들도 나를 말렸지만 이미 결심이 선 상태였다.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하고 계신데 그게 항상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해주시고 응원해 주신다.  
 
 - 아내 분이 현지에서 약사 일을 돕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는 약사는 아니고 약국집 딸이었다(웃음). 그래서 약을 잘 다룬다. 주말에 이동 진료를 갈 때 같이 다니면서 도와주고 있다. 아내가 반대했으면 이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거다.
 
- 필리핀에서 2년간 의료봉사를 하고 네팔로 떠났다. 네팔로 활동지를 옮긴 이유는 무엇이었나 
  2004년도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진료소를 열기에는 조건들이 너무 까다로웠다. 필리핀에서는 한국 의사 면허를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현지에서 의사생활을 하기에 법이 굉장히 엄격해서 수술을 할때마다 허가를 받아야 했다. 진료를 하다가 중환자를 만나도 치료할 수 없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지구촌에서 의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봤더니 네팔이 나오더라. 그래서 옮겨오게된 거다.

진료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네팔 주민들과 박철성 원장
 
-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사람들(아미사)’이라는 작은 후원단체가 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만든 모임이라고 들었다  
  아미사는 나와 제일 친한 친구가 만들어준 작은 카페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친척들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작은 돈이지만 천 원, 만 원씩 후원을 해줬고 그 돈으로 한 명, 두 명 수술을 해줄 수 있게 됐다. 처음에 나는 후원단체가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고 순수성이 깨질 것 같아서 반대했다. 그런데 친구가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나를 설득했다. 결국 친구의 고집으로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군 역할을 해주고 있다. 
 
- 다른 통로를 통해서 후원을 받고 있지는 않나 
  해외에 나가있는 의사들은 대부분 선교사 자격으로 나가있다. 나도 선교사로 파견되어 있긴 하지만 종교 단체의 직접적인 후원은 받고 있지 않다. 아미사에서 환자 치료비를 조금씩 후원해 주는 것 말고는 다른 후원단체가 없다. 대부분 자비로 해결하고 있고 보수가 없이 일을 한다. 
 
- 그러면 경제적인 부담도 클 것 같다. 약품을 구하거나 의료 시설을 마련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다. 조금씩 후원을 받긴 하지만 무한정 수술해주고 약품을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다. 특히 약품을 구하기가 어렵다. 십시일반해서 구하고 있고 직접 제약회사에도 찾아가 후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큰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항상 부족하다. 
 
- 네팔은 UN이 선정한 세계 10대 빈국 중 하나다. 현지 사정이 많이 열악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열악한지 감이 안 잡힌다 
  네팔에서 지내다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인간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회의가 든다. 비참하고 눈물 난다. 네팔에는 그 흔한 하수도도 없고 난방도 안 된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집 안에 텐트를 치고 침낭 안에 들어가서 잔다. 또 하루에 전기가 4시간 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도인 카트만두가 이 정도인데 다른 지역은 어떻겠나.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열악하다. 
 
- 네팔의 의료 수준은 어떤가 
  사람들이 흔히 네팔 의료 수준이 어떠냐고 많이 묻는데 현지 상황을 잘 모르니까 하는 질문이다. 네팔은 의료 수준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 암 같은 질병으로 죽는 게 아니고 장염, 설사병 같은 병 때문에 죽는다. 링겔 하나만 맞으면 살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고 현지 상황도 열악한데 그곳에 계속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세대 사람들은 가난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나도 한 끼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배고플까, 얼마나 추울까’ 이해하게 된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제 3세계에서 진료를 하다 보니까 한국에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한 번이라도 이동 진료를 더 해서 한 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제일 못 사는 줄 아는데 네팔은 그보다도 못하다. 정말 충격적이다.   
 
  네팔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다. 아프면 아파하고 죽을 때가 다가오면 절실하게 살려달라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소망은 다 똑같다는 것을 느낀다. 또 그동안 내가 나밖에 모르고 살았구나 많이 반성하게 된다.  
 
- 한국에 다시 돌아올 계획은 없나
  돈 떨어지면 돈 벌러 가야한다(웃음). 이 일은 멈출 수 없다. 일종의 중독 같다.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할 거다. 사실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봉사를 하면 그런 욕심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감사하다.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도 감사하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도 감사하게 된다. 내가 사람들에게 진료를 해주지만 배우는 것이 더 많다. 
 
- 중앙대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학 생활을 하다보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나눌수록 행복해지니 많이 나누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다.             
 
 
 
정소윤 기자 abc@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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