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화술은 인형을 부리는 복화술사가 인형이 말을 하는 것처럼 꾸며내는 기술이다. 복화술사는 말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인형을 내세운다. 인형극에서 복화술은 재미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복화술의 원리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말하기 거북한 말을 다른 사람을 시켜 말을 할 때에도 적용된다. 나는 복화술사의 조종을 받는 인형이다.
 

  우리 대학은 최근 일부 학문단위의 축소와 폐지라는 구조조정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제는 수업에 대한 구조조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 이미 많은 강좌가 폐지되었지만 내년에는 강좌 수를 약 10% 정도 더 줄일 계획이라고 한다. 폐강과 분반 기준이 상향 조정되며 이를 엄격하게 시행할 것이라고도 한다. 200명 이상이 한 강의실에서 수강하는 대형 강의가 신설되며 이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도 한다.
 

  강의제도 개편의 골자는 소규모 강의를 축소하고 대형 강의를 확대하는 것이다. 대형 강의는 주입식 교육이 되기 쉬우며 이는 교육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상식이다. 소규모 강의에서 가능한 자유로운 토론, 과제물에 대한 교수의 첨삭지도, 강의실 밖에서의 교수와 학생간의 교류 등이 대형 강의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 교육이 지식의 주입을 넘어 학생 개개인의 지성의 연마와 창의력의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대형 강의에서는 그러한 대학 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
 

  개설 강좌 수를 줄이고 대형 강의를 확대하는 강의제도 개편을 두고 본부 측은 이를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중대신문 11월 7일자). 어떻게 대형 강의가 강의의 질을 높이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치즘의 홍보 책임자였던 괴벨스는 ‘거짓말을 되풀이하라. 그러면 진실이 된다’라는 홍보 전략을 제시하였다. 대형 강의가 수업의 질을 높인다는 말은 괴벨스가 되풀이하면 진실이 된다고 하였던 거짓말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조직이다. 연구와 교육 그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학생이 대학 운영비를 부담하는 한국 대학에서 교육은 더욱더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강의제도 개편은 교육을 희생시킨다. 이는 학생을 희생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학생이 대학운영비를 부담하던 초기 유럽 대학에서는 학생대표가 총장이었으며 대학운영의 모든 권한을 학생회가 갖고 있었다. 지금 우리 대학에서 학생은 대학운영비를 거의 모두 부담하면서도 대학 운영에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상식적으로도 대학 운영에 참여하는 여러 조직 중 학생조직은 어느 집단보다도 권한이 커야 한다.
 

  교수 조직에 속한 나는 교육의 질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다. 교육의 질을 이야기하는 이 글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복화술의 인형이다. 인형도 때론 지친다. 이제는 복화술사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대학은 인형극 공연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부응 영어영문학과 교수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