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멋모르고 국악계에 입문한 그녀는 어느덧 서도소리를 대표하는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목이 아파 노래를 할 수 없었던 힘든 시절도 혼자 힘으로 이겨낸 그녀는 진정한 오뚝이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몸담으며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는 열정적인 인간문화재, 김광숙 명창을 만났다. 
 
“절절한 노랫가락이 좋아 
이 길 걸어온 지 40년
이제는 소리와 함께
그리움으로 남고싶어” 
 
 
 
 
  국립국악원의 아침은 부산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단원들은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고 스탭들은 분주하게 공연 장비를 나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연습실 여기저기에선 노래 소리와 장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곳에는 진심을 다해 노래하고 있는 김광숙 명창이 있었다.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권위적이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잘못 짚었다. 소박하고 털털한 말 그대로 ‘인간’ 문화재였다.  
 
- 처음 소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그래서 1년간 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재수를 했다(웃음). 그때 아는 분이 국악고등학교라는 곳이 있다고 귀띔해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악이 뭔지 전혀 몰랐다. 거기 가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맘껏 부를 수 있다고 하길래 ‘재밌겠는데?’ 하고 시작하게 된 거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기능 보유자이신 오복녀 선생님께 소리를 배웠다. 소리 쪽은 사사하는 일이 까다로운 것으로 아는데 
  오복녀 선생님은 고등학교 은사님이시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오복녀 선생님의 전수자가 되어 처음 소리를 배웠다. 사실 그때는 전수자가 뭔지, 전수자가 되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웃음). 그냥 노래가 좋았을 뿐이다. 소리 쪽은 사사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운 좋게도 내가 선생님께 선택을 받았다. 내 재능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 

- 어린시절부터 늘 함께해 온 오복녀 선생님이 김광숙 명창에게는 남다른 존재일 것 같다   
  오복녀 선생님은 나의 스승이기도 했지만 벗이기도 했다. 선생님 집에 자주 놀러가서 수다도 떨고 가끔은 선생님 댁에서 자고 같이 등교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시고 많이 아껴 주셨다. 
한때, 소리를 잠시 그만두고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선생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나를 설득하셨다. 안타깝고 섭섭하시다면서.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소리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소리에만 전념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그렇게 흔들릴 때도 선생님이 곁에서 항상 붙잡아 주시고 응원해 주셨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나보다 
  소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수입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사로도 활동하고 여기저기 공연도 다녀야 한다. 온전히 소리에만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나는 공부에 많이 몰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공부를 정말 좋아했나 보다.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는 민요를 가르치는 대학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 갈 생각은 못했고 개인적으로 소리 공부만 했다. 그러다가 31살에 국립국악원에 오게 됐다. 여기에서 지내다 보니 '공부가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다. 마침 중앙대에 민요학과가 신설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때부터 머리 싸매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해서 예비고사를 봤고 민요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 늦깎이로 시작한 대학공부가 힘들지는 않던가 
  늦게 시작한 공부라 많이 힘들었다(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해냈나 싶다. 4년 동안 지각, 결석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4년 내내 실기 장학금도 받고 수석 장학금도 받았다. 나를 얄미워했던 학생들도 있었을 거다(웃음). 나이 먹으니까 암기도 잘 안되고 힘들더라. 졸업시험을 보려면 영어 성적이 필요했는데 영어 공부가 제일 어려웠다. 토플, 토익을 공부했는데 3년 동안 6번이나 시험을 봐서 겨우 점수를 만들었다. 새벽반 학원 다니랴, 과외 하랴 너무 무리해서 링겔 맞고 공부한 적도 있다.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다.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것이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기억이다.  
 
 
- 현재 서도소리 기능 보유자이시다. 서도소리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서도소리는 실향민의 예술이다. 때문에 열악한 종목이기도 하다. 이북 사람들의 감정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다. 슬퍼도 슬픔을 표현 안하고 기뻐도 기쁨을 표현 안한다. 그게 음악에도 똑같이 반영되어 있다.  
 이성계가 득세한 후에 관서 지방 사람들만 과거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한 때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가장 큰 꿈이 과거 급제를 해서 벼슬을 얻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이 원통함을 표현하기 위해 불렀던 <수심가>가 서도소리의 대표적인 민요다. 노래가 굉장히 애절하고 구슬픈데 거기에는 꿋꿋함도 담겨있다. 결단력도 느껴지고. 
 
- 다른 소리와 비교했을 때 서도소리만의 특징은 뭔가 
 서도소리의 장단은 불규칙하다. 일정한 장단보다 불규칙적인 장단의 곡을 부르기 더 힘들다. 때문에 서도소리는 음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화하기 어려운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남도소리가 애절함이 있는 통곡이라면 서도소리는 통곡보다는 절절함이 있다. 또 노래에 꿋꿋함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주는 소리다. 실향민들도 남한에 와서 서도소리를 들으면 희망이 생기고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또 서도소리는 다른 소리에 비해 떨림이 많다. 떨림에 관한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 서도소리의 떨림에 대해 써보려고 했다. 그래서 컴퓨터 공학도에게 부탁해서 서도소리의 진동수와 진동폭에 대한 분석을 요청했다. 그런데 컴퓨터 프로그램이 노래를 인식하지 못하더라. 왜 그런가 봤더니 소리가 곡선이기 때문에 분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노래의 떨림이 정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주제로 논문을 쓰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 흔히 판소리 창가들이 득음을 한다는 말이 있다. 득음을 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 
 득음은 누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참 어려운 것이다. 애매하긴 하지만 ‘완벽한 음에 도달하는 것’ 정도로 득음을 정의할 수 있겠다. 어떤 한 음을 계속 대해 보면 같은 음인 것 같지만 다 다르다. 오늘 부른 것과 10년 후에 부른 음도 다르다. 흔히 음을 얻는다고 말하는데 음을 얻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경지라는 말을 하지 않나. ‘득음의 경지’.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나도 ‘아, 이런 게 득음이구나’ 싶은 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함을 느낀다.  

- 매일 음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하니 목에 무리도 많이 갈 것 같다. 목 관리가 중요할 것 같은데
 목은 내 목숨과도 같다. 감기에 걸린다든지 목이 쉰다든지 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다. 사실 5년 정도 제대로 목을 쓰지 못한 때가 있었다. 오복녀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바로 그렇게 돼서 더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그건 결국 내가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다. 혼자 연구하고 자가 치료를 하면서 목 박사가 다 됐다(웃음). 이제 사람들 목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아픈지 다 알 수 있다.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하루에 6시간 정도는 목을 쓴다. 많을 때는 10시간도 가르친다. 힘들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목에게만 집중해야 하고 주의해야 할 사항도 많다. 
 
- 요즘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랩이나 비보잉에 의해 우리 가락이 재탄생되고 있다. 이러한 국악의 변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어쨌든 변용된 것을 통해서 원형을 알 수 있고 전통적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면도 있다. 우리 음악에는 우리 정서가 담겨 있다. 우리 것을 먼저 알고 접했으면 좋겠는데 요즘 세상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서도소리를 배우려는 제자들은 어느 정도 되나 
지금 나한테 서도소리를 배우는 사람만 20명 정도 된다. 학생들 상태에 따라서 수준에 맞게 가르치고 있다.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이 보는데 열심히 따라주어서 고맙고 대견스럽다. 

-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아쉬움은 없나 
에이, 아쉬울 게 뭐 있나. 서도소리를 알리고 전파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고 내가 맡은 책임이다. 서도소리를 만나서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내가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철주야 가르칠 것이다. 
 
- 어떤 국악인이 되고 싶나 
깨끗한 지혜를 가진 모범적인 국악인으로 남고 싶다. 인간적으로 그리고 국악인으로서 부족함을 계속 채워나가고 싶다. 사실 노인이 되면 젊은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 젊은 사람들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싶어 하고 그리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글/사진 정소윤 기자 abc@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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