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2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와 인근의 우퇴위아 섬에서 참담한 비극이 발생했다. 팔십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당한 이 사건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알려진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라는 백인 청년이 치밀한 준비 끝에 저지른 계획적인 학살극으로 밝혀졌다. 그는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1500쪽짜리 『유럽 독립 선언』이라는 글에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반이슬람주의라는 범행 동기와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 자유로운 유럽 토착인들은 서유럽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다문화주의자들에게 선제적 전쟁을 선언한다”는 대목이 있다. 2005년에 있었던 런던의 폭파사건과 파리 근교 폭동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에는 북유럽의 천국처럼 여겨지던 노르웨이에서 학살극이라니!
 

  게다가 브레이비크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일본·남한·대만은 단일문화이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평화로운 사회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단일문화의 ‘롤 모델’(role model)이라고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단일민족을 지나치게 믿어왔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다문화사회로 변화한 것을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는 우리가 단일문화의 롤 모델이라고? 과연 우리는 극우 학살범이 그토록 염원하는 단일문화의 이상향인가, 아니면익히 알려진 것처럼 다양한 인종·민족·문화의 사람들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다문화사회인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체류외국인의 숫자는 이미 오래 전인 2007년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2011년 6월말 현재 한국에는 중국노동자들을 포함해 약 6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고, 19만 명에 가까운 결혼이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 외에도 2만 명을 넘은 북한이탈주민들, 6만 명을 넘은 유학생들, 그리고 3천 명이 넘는 난민 및 난민지위신청자들이 있으며, 이제는 거의 잊혀진 2만 명의 화교들, 그리고 숫자조차 파악이 잘 안 되는 주한미군을 아버지로 둔 혼혈인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앞으로도 여러 부류의 이주민 숫자는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이며 점차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왜 이주민이 늘어날까?
 

  이주민의 증가를 설명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때문에 빚어질 노동력의 절대적 부족, 소위 3D산업 기피로 빚어지는 노동력의 구조적 공백,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일본보다도 빠른 고령화 속도 때문에 우려되는 노인을 부양할 인구의 부족, 농촌 총각을 비롯해서 낮은 계층 남자들의 배우자 찾기 어려움이 초래하는 사회적 불안정,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한국 사회는 이주민들을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정부는 이런 흐름을 재빨리 파악했고, 2006년 4월 26일에 故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이 다인종·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으며” 따라서 “다문화 정책을 통해 이주자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의 발표가 있고 나서 불과 한 달 만에 교육인적자원부는 단일민족주의 위주의 교과서를 다문화를 강조하고 타 인종에 대한 관용을 장려하는 하는 내용으로 수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는 이주여성들과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도입하고, 법무부는 외국인노동자정책이 아니라 이민정책을 주제로 하는 공청회를 열기 시작했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치고 단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국민들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찬양하고 있는 다문화주의는 대상 집단을 차별하는 다문화주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지금 우리의 다문화주의는 오직 결혼이주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주의라는 말이다. 실제로 2008년에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은 외국인이 한국인과 결혼했을 경우에만 다문화 정책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주민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인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해서 난민들, 유학생들, 화교들은 다문화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전쟁과 분단의 아픈 역사 때문에 미군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던 혼혈인들이나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국으로 입양을 갔다가 성인이 되어 모국으로 돌아와 정착하고자 애를 쓰는 어눌한 한국말 발음의 입양인들도 마찬가지다. ‘종류’에 따라서 대상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다문화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우리의 다문화가 결혼이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중에서도 여성들만을 다시 한 번 골라낸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국제결혼의 약 13.4%는 우리가 생각하는 반대의 성별 조합이다. 즉 한국인여성과 외국인남성 간의 결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로버트 할리 같은 일부 유명인을 제외하면 한국인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들은 우리의 관심이나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문화정책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다문화정책은 철저하게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다. 왜 그럴까? 혹시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사고방식 때문은 아닐까? 어차피 핏줄은 남자 쪽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니까 ‘씨’가 우리 것이면 ‘밭’은 빌려와도 괜찮다는 은밀한 합의의 반영은 아닐까? 결국 외국에서 ‘씨받이’를 잘 수입하는 것이 우리의 다문화인가.
 

  한국의 경제구조나 갈수록 세계화되어가는 국제질서를 고려해보면 이주민의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더 많은 ‘며느리’들,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 더 많은 유학생들, 더 많은 중국동포와 북한동포들이 들어온다. 이렇게 다양한 이주민들 중에서 결혼이주민만 골라서 다문화정책을 편다는 것은 또 다른 소외를 낳을 뿐이다. 실제로 다문화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일제단속과 강제출국은 강화되어 왔다. 소외받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받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들끼리의 공간과 문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차별을 당하고 문화적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형성되고 그들만의 고립된 섬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커진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섬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이 다문화일 수 있겠는가.

박경태

학력 
연세대학교 사회학 학사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사회학 박사
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전공
소수자 연구

저서
『인권과 소수자 이야기』 책세상  2007
『소수자와 한국사회』 후마니타스  2008

글 싣는 순서

① 우리의 현실 속 다문화
② 다문화 사회의 다문화주의 논의
③ 정책 차원의 다문화 주의
④ 다문화 사회의 지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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