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로]  모든 강의실은 이곳으로 통했다
  2008년 이전에 중앙대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걸어본 길이 있다. 일명 ‘Y로’다. Y로는 정문에서 시작해 영신관을 끼고 교양학관과 파이퍼홀 쪽으로 나뉜 ‘Y’자 모양의 길이었다.
  Y로가 가로지르고 있는 영신관 앞은 ‘루이스가든’으로 불렸었다. 지금의 영신관 앞 잔디밭에 102관 부지까지 합친 규모로 크기가 상당했다. 2008년에 102관 건축과 함께 정문에 변화를 주기 전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970~80년대 루이스가든은 단과대 축제의 장소이자 민주화투쟁의 장소였다. 1970년대 단과대학 축제는 대부분 루이스가든에서 진행됐다. 당시 축제의 유행테마는 쌍쌍파티였다. 커플을 맺는다기보다 친구를 데려오는 의미의 파티였다. 축제 참여율은 상당히 높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별다른 놀거리가 없었고, 이성을 만날 기회도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기간 루이스가든은 설렘을 안은 젊은 남녀들로 북적였다.  
  1980년대 루이스가든에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교내의 가장 넓은광장인 만큼 시위의 장소가 되었다. 학생들은 루이스가든에 모여 독재정권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외쳤다. 경찰과는 주로 정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경찰의 진압을 통해 시위대가 해산되면 학생들은 Y로를 통해 교양학관과 파이퍼홀 양쪽으로 흩어져 도망치곤 했다.
 

 
[구름다리] 예뻤던 그녀를기다리던 곳
  중문의 상도역 방향 버스정류장 뒤에는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원래 여자기숙사와 희락관(1950년 준공된 법정학과 증설을 위한 시설), 가정교육과 실습실이 위치했던 곳으로 주로 여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금남의 장소와 연결된 다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교양학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육교였다. 남학생들은 비록 그 다리를 건널 수는 없었지만, 마음에 둔 여학생을 기다리기 위해 다리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박창진 법인 부처장(토목 79학번)은 “당시 가정교육과 여학생들은 신붓감 1순위로 인기가 상당했다”며 “다리주위에 남학생들이 많이 서있었다”고 말했다. 50년대에 건축된 다리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1996년 2월에 철거됐다. 
 

 
[옛 정문]  전경과 학생사이
  민주화 열망이 뜨거웠던 1980년대, 의혈 중앙대에도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다. 영신관 앞에 모여 데모하는 학생들과 경찰 사이에 대치선이 되는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정문이다. 당시 정문은 한옥식으로 만들어진 기와정문이었다. 학생들과 경찰 사이에 놓였던 정문은 날아오는 최루탄과 화염병에 종종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70년대 정문에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바로 학생지원처 교직원들이 학생들의 등교지도를 하는 모습이다. 정문에서 복장을 단속하고 학교 배지를 달았는지 검사해 불량한 학생은 학교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정문 앞에선 치열한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인공은 바로 충무칼국수, 안동장, 영합식당이다. 현재 정문 앞에는 안동장만 남아있지만, 충무칼국수와 영합식당도 학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엽 서울캠 행정지원처장(축산 72학번)은 “충무칼국수를 모르면 중대생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며 “겉절이와 칼국수에 넣어주는 콩가루가 일품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에 만들어진 한옥식 정문은 이후 1985년에 내구성이 강한 콘크리트 기둥으로 세워져 존재해왔다. 1990년대 후반 동작구의 울타리 없애기 정책에 동참하며 허물어졌다.

 

 

<개교기념특집 기획팀>
이지영 기자 E_Z0@cauon.net
이현선 기자 2hyunsun@cauon.net
이순호, 김혜원, 김누리, 조은희 수습기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