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비만 오면 물이 차서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하는 동네에 건물하나가 들어섰다. 이름하야 영신관. 영신 할머니의 열정에 이름 모를 노란 머리 외국인들이 힘을 보탰다. 그렇게 중앙대의 역사가 시작됐다. 학생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건물도 늘어났다. 주변의 마을을 허물어 강의실을 만들고 운동장을 조성했다. 그렇게 세워진 건물들은 오랜 시간 중앙대의 터를 지키며 의혈의 젊음과 함께했다. 어느덧 중앙대는 100살을 바라보고 있다. 중대신문이 개교 93주년을 맞이해 학교건물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를 찾아보았다.

 

 

 

[청룡연못] 2018, 청룡이 깨어난다
  청룡연못은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자연못이다. 연못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도록 다듬은 것은 1968년이다.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며 연못을 조성하고, 중앙대의 상징인 청룡상을 세웠다.
  청룡상에는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바로 청룡상 안에 묻힌 중앙대 타임캡슐이다. 1968년 당시에 청룡상을 제작하면서 동상 안에 임영신 박사의 유품 등 중앙대의 보물이 담긴 타임캡슐을 넣어두었다. 이 타임캡슐은 개교100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원래 청룡연못은 지금보다 수심이 깊었다. 물고기도 많이 살아 팔뚝만한 잉어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수심이 계속 유지되다가 2010년에 연못을 재정비하면서 바닥에 돌을 깔아 정리하고, 수위를 낮췄다.
  1970~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선배들도 청룡연못에 많이 빠지곤 했다. 생일을 맞이한 친구를 빠뜨리거나 연못 주위에서 술자리를 가졌다가 흥에 겨워  돋아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동일 교수(영문 85학번)는 “겨울에는 수위아저씨 몰래 얼어있는 연못에서 썰매를 타고, 여름에는 청룡연못 주변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영신관]중앙대 터줏대감
  영신관은 1938년 준공 이래로 73년째 중앙대를 한결같이 지키고있다. 중앙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이름은 중앙대 설립자인 승당 임영신 여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영신관은 임영신 여사의 각고의 노력 끝에 지어진 건물이다. 총독부의 감시 하에 국내유지로부터의 보육학교 운영자금이 어려웠기 때문에 임영신 여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미국의 유력지인 ‘World Telegram’에 보도될 정도로 새 교사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임영신 여사는 각고의 노력 끝에 워싱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을 통해 자동차왕 포드, 록펠러 2세, 발명왕 에디슨의 부처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영신관을 지을 수 있었다.
  영신관은 1967년까지 본관과 강의실 역할을 했다. 총장실과 행정실은 물론 사범대, 농대(현 산업대)등 여러 단과대 학생들이 강의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1968년 현재의 본관이 준공된 이후엔 강의실과 교수연구실로 사용됐다. 현재 영신관 내부에 있는 ‘대학교회’는 영신관이 처음 건립됐을 때부터 있었다. 곽동성 교수(경영 67학번)는 “학부생 시절에도 영신관의 대학교회에서 학생들이 기독교동아리 활동을 했었다”고 기억했다. 
 

 

[파이퍼홀]후원자 이름 따 지어져
  파이퍼홀은 1955년 5월에 착공하여 1956년 4월 20일에 완공됐다. 1956년 5월 18일 성대한 준공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수많은 내외귀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하지만 파이퍼홀이 처음부터 파이퍼홀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처음의 파이퍼홀은 ‘약학대학’으로 불렸다. 여기저기 건물을 옮겨 다니던 다른 단과대와는 달리 약학대학은 파이퍼홀에서 역사를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68년 개교 50주년을 맞이해 파이퍼여사의 흉상을 건물입구에 부착하며 ‘파이퍼홀’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파이퍼 여사는 임영신 여사의 측근이자 후원자로 파이퍼홀을 지을 수 있도록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제약회사 이사장이었던 E.H.Bobst가 파이퍼여사의 유지에 따라 10만 달러를 기증해 파이퍼홀이 지어질 수 있었다.
  파이퍼홀을 함께 사용하던 산업대, 자연과학대가 자리를 옮기며 1995년 이후엔 약학대학이 전체를 사용했다.
  2011년 102관의 완공으로  약학대학은 자리를 옮겼다. 현재 파이퍼홀은 공사중이다.
 

[교양학관]4.19정신을 담아 
  1962년 준공된 교양학관의 첫 이름은 ‘4월 학생관’이었다. 4.19혁명 직후 임영신총장은 학생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학생관을 신축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 4월 학생관이었다. 
  4월 학생관은 강의를 듣는 공간으로도 사용됐다. 정경대, 경영대, 문리대 학생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들었다.
  중대신문, 중앙헤럴드, 총학생회 회의실 등이 들어서 있었던 학생관은 학생활동의 중심지였다. 또 학생휴게실, 식당, 이발관, 다방 등의 편의시설도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다.
  4월 학생관의 명물은 단연 팔각정 칼국수였다. ‘팔각정’내에 위치한 매점에서는 빵, 음료수, 라면 등 다양한 음식을 판매했는데 칼국수가 특히 일품이었다. 2007년 사라지기 전까지 팔각정 칼국수는 중앙인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2010년에 없어진 교양학관의 ‘정경계단’ 역시 학생들이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었던 추억의 장소였다.  
  건물의 이름은 4월 학생관에서 사회과학관으로 바뀌어 불리었다. 건물의 이름이 사회과학관으로 개명된 정확한 시기가 명시된 자료는 없다. 이후 2007년 사회과학관은 교양학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금의 교양학관은 교양강의를 듣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서관]중앙대 문화재로 남다
  중앙대 도서관은 1958년 10월 25일 신축공사를 시작해 약 1년 후인 1959년 10월 23일 준공됐다. 초기 도서관의 이름은 ‘우남기념도서관’이었다. ‘우남’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이다. 외국에서 지원한 도서관건립기금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협조를 받아 도서관을 건립했기 때문에 ‘우남기념도서관’으로 명명했다.
  당시의 도서관 규모는 지하 1층~지상8층으로 4,700평이었다. 3개층 정도가 온전히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나머지 공간은 부족한 강의실의 역할을 했었다. ‘우남기념도서관’으로 불리우던 중앙대 도서관은 4.19 의거 이후 지금의 ‘중앙도서관(중도)’으로 개명됐다.
  그 후 중앙도서관은 문화재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5년 11월, 문화재청이 중앙도선관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할 것을 예고했다. 하지만 2006년 1월, 교무위원회는 중앙도서관이 근대 문화재로 등록되면 보수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보존되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문화재청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중앙도서관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고 2008년 11월 리모델링 및 증축공사 시행을 결정한다. 중앙도서관 리모델링은 김인철 교수(건축학부)가 맡아 학생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9개월 만에 공사를 마쳐 2009년 8월 준공했다.
 

[서라벌홀]예술대 첫 둥지
  서라벌홀이 처음부터 ‘서라벌홀’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1년, ‘참되고 선하라’는 의미의 진선관(眞善館)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진선관은 법정대(법대, 정경대, 경영대)와 문리대(문학부, 이학부)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1960년 당시에 이 건물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금의 반쪽이었다. 지금의 서라벌홀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법학관 쪽에 위치한 부분만 있었다. 
  1972년 서라벌 예술대학을 인수하면서 건물을 증축하고 이름을 ‘서라벌홀’로 바꿨다. 해방광장 쪽으로 놓인 부분을 원래 건물과 붙여서 연결하는 형식으로 증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예대가 들어오면서 문리대와 정경대, 경영대 학생들은 지금의 교양학관 건물로 옮겨갔다. 이후 법대학생들과 예대학생(문예창작학과, 연극영화과, 무용과, 사진과, 방송과, 미술과, 공예과, 음악과)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들었다.
1982년 예술대가 안성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문리대 학생들이 사용했다. 1995년 준공된 수림과학관으로 자연과학대 학생들이 옮겨간 후 문과대 학생들이 사용해오고 있다.

 

 

<개교기념특집 기획팀>
이지영 기자 E_Z0@cauon.net
이현선 기자 2hyunsun@cauon.net
이순호, 김혜원, 김누리, 조은희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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