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써야할지 난감하기는 이 코너를 맡은 이후 처음인 듯하다. 문제의식은 있되 이를 제대로 살릴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문제의식도 없는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조차 모호하다.

  우선 지난 호 주요 쟁점이었던 캠퍼스 통합과 관련된 기사를 먼저 보자. 총 4개의 관련 기사를 다루고 있지만 물리적 통합이 결과한 문제점과 분리 평가라는 모순된 상황을 단순히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기사들을 산만하게 펼쳐놓아 기사마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마치 변별적인 문제들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문제가 되는 쟁점들에 대한 정리, 독자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유도할 수 있는 분석 기사가 부재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단순’ 전달한 대학보도 기사는 불성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둘째, ‘또 다른 시선을 만나다’란은 점입가경이다. ‘모성’이나 ‘가족애’로 포장된 감정노동의 수행자로서 ‘엄마’라는 주제를 잡은 듯 보였지만, 기실 주된 내용은 여성의 생물학적 갱년기 문제를 다룬다. 갱년기에 접어든 엄마의 건강을 살펴야한다는 의미인지, 엄마의 ‘짜증’과 ‘상실감’은 다 생물학적인 문제이니 이해하라는 의미인지. “갱년기 오해와 진실” 대신, 적어도 ‘모성’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글이 박스 기사로라도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사회에 강고한 젠더화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강박적 역할 수행의 결과, ‘엄마’라는 ‘무직업’이 어떻게 억압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지 이해하고 기사를 썼더라면 달라졌을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관심과 애정의 증거다. 중대신문에 대한 오랜 나의 마음은 정녕 짝사랑에 그치고 말 것인가?

이나영 교수(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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