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서라벌홀(203관) 814호에서 142번째 게르마니아(독어독문학과 콜로키움)가 개최됐다. 강연자인 이상화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유토피아를 역설하던 19세기 말은 혼란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은 과잉생산을 불러와 인간의 노동을 착취대상으로 만들었고 자본주의는 빈부 갈등을 낳았다.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가 19세기 들어 왕성해진 것은 이러한 시대상황에 기인한다.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는 그의 저서 『돌이켜 보면』을 통해 유토피아 논의에 불을 지폈다. 그는 완벽한 체제를 통한 이상 사회를 구상했다. 잘 조직된 집단 체제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며 종교적 체제에 기반을 둔 이타적 공동체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유토피아에 환호했다.
  그러나 윌리엄 모리스는 그러한 유토피아 사회가 인간을 그저‘기계’로 만들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장편소설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을 통해 인간 중심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했다.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예술가였던 그가 구상한 유토피아에는‘평등’과‘예술적 삶’에 대한 기대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잉 생산이 없기 때문에 모든 작업은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생산활동은 기계적 행위가 아닌 예술로 받아들여진다. 잉여 산물이 없기 때문에 부의 축적도 없으며 당연히 빈부 차도 없다. 자연만이 그곳의 재화이며 만인은 그것을 평등하게 향유한다. 이상화 교수는“행복한 사회에서 인간의 선함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며 모리스의 유토피아에 무게를 실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과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기존의 논의는‘미래지향적인 유토피아’에 한정됐다. 앞서 말한 에드워드 벨라미 뿐 아니라 동시대의 웰스(H.G. Wells)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도 기술적 진보에 의한 유토피아를 기대했다. 생명연장이나 생산성 문제와 관련해 기술의 역할은 지대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기술이 상당히 진보한 현대사회에도 결코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19세기 말에 비해 평균 수명이 3배 이상 증가했고 생산성도 2배 이상 증가했지만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다. 과거 회귀를 논하는 모리스의 유토피아가 한층 설득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가치는 실현 가능성에 있지 않다. 윌리엄 모리스가 유토피아를 개인의 꿈이 아닌 모두의 비전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러한 맥락이다. 유토피아 논의를 통해 더 나은 현실을 위한 상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상화 교수는“유토피아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구속력이다”라며 강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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