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공감력 회복의 열쇠
이제는 디지털과 거리를 둘 때

 

반값등록금 투쟁을 보며 우리는 설렘을 느꼈다. 무기력하던 우리가 변화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1년 가을 호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과 『문학동네』가 ‘노예’가 된 현대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의 요구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창비』는 연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문학동네』는 기계들에 자기통제권을 전이시키고 생각할 힘과 공감력을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던진다. 『창비』의 <더 나은 체제를 향해>(김종엽), <중산층의 욕망과 커지는 불안들>(김현미)에서는 허상의 가치를 좇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스펙에 열광하는 청년들은 인간을 상품적 기준으로 측정 가능하도록 변모시키는 ‘물화’ 양상을 좇고 있다. 몰락한 중산층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소비의 사이클 안에서 무한히 고갈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문학동네』의 <비현실적인 몽상가로서>(무라카미 하루키)에서 ‘효율’을 추구하는 인간상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효율적인’인간의 최후는 방사능 누출로 인한 아픔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두 계간지가 내어놓은 해결방식은 다른 듯 비슷하다. 『창비』의 해결법은 공감을 통한 연대의식 회복 및 실천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공감력의 회복이다. 『창비』에 비해 『문학동네』의 대안은 다소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둘다 공감을 전제한다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서 『문학동네』에 제시된 문제의식으로부터 힌트를 얻자면 디지털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꽤나 좋은 접근일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러한 아날로그화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좋은 도구다.


두 계간지 모두 김애란, 황석영 작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날로그화 도구로서의 문학’이라는 지점으로부터 두 작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세상』의 차미령 편집위원은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과 관련하여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최초의 순간으로 바꿔놓으며, 인생의 가장 환한 장면으로 점프한 이야기꾼의 마법적인 비상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애란 작가의 작품 내에 속세를 떠나 순수한 태초로 돌아가는 희열이 드러나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창비』의 정지아는 ‘이 질긴 욕망의 세계에서 이러한 가치를 요즘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듯한 그의 행보를, 적어도 나의 무기력보다는 아름답지 않은가…(후략)’라는 말을 통해 황석영이 숭고함, 인내와 같은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김애란, 황석영 두 작가가 내세우는 가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스스로의 본연에 귀를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는 것이며, 공감력의 회복을 통한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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