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인류에 대한 봉사’라는 막연한 꿈을 품고 의대에 진학했다. 부인과 함께 부부의원을 개업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며 소박한 삶을 꾸렸다. 갈거리 사랑촌을 시작으로 소외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원주의 ‘나눔 전도사’. 중앙대 의학과 1회 졸업생 곽병은 동문을 만났다.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건물들, 그 사이 낡고 허름한 병원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20년 세월에 겉모습은 많이 닳았지만 다른 병원에서 찾을 수 없는 특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 바로 부부의원이었다.

교도소 의무과장, 15년간의 특별한 시간

- 지난 15년 동안 원주교도소의 의무과장으로 일했다.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수감자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교도소 안에는 사건 사고가 많다고 들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인물이 혹시 있나
  한 수용자가 말을 거칠게 해서 내가 다그친 적이 있었다. 내가 쓴 소리를 하니까 그 친구가 흥분을 해서 앉고 있던 의자를 들고 나한테 던지려고 하더라. 바로 앞에서. 그 때 직원이 와서 말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맞을 뻔 했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어제 그 친구가 조사실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더라. 전날 나한테 한 행동 때문에 일부러 잠을 안 재웠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등을 두들겨 줬더니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
  이렇게 그 친구들이 마음을 못 잡고 따뜻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뒤에 그 친구가 출소했다고 들었는데 찾아오지는 않았다(웃음).


- 대부분의 의사들이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것을 기피한다고 들었다. 공무원이 될 생각이었으면 보건소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굳이 교도소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1992년 당시 원주 교도소에서 의사를 못 구하고 있었다. 다들 안 가려고 하니까. 나는 집사람이랑 같이 진료를 보니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런 걸 알고 교도소에서 찾아와 부탁하더라. 한 달만 해보자고 시작한 일을 15년이나 하게 됐다.
  사실 우리 아버님도 의사였다. 옛날 독립문 근처 소년원에서 아버님도 의무과장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버님 대신에 3년정도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이 점도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청년 곽병은, 슈바이처를 꿈꾸다

- 젊은 시절에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거창하지만 ‘인류에 대한 봉사’가 나의 젊은 시절 꿈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의대에 진학했다. 할머니의 영향도 있고 아버님의 영향도 있었다. 할머님은 항상 착한 일하라고 말씀하셨고 나에게 늘 신부가 되라고 권유하셨다. 신부가 될 생각도 있었는데 잘 안되더라(웃음).


-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
  아주 완고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맞으면서 자랐다. 내가 의대에 가는 것도 아버님은 반대하셨다. 의사는 힘들다고. 그래서 몰래 지원했다.
  아들에게는 무서운 분이셨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다. 돈이 없는 환자들은 공짜로 치료해주시고 달동네에 사는 어려운 가정에 직접 쌀도 가져다 주셨다. 아버님이 하신 일들을 보고 배우면서 정체성을 세웠던 것 같다.


- 의대에 갓 입학한 학생들을 보면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제 2의 슈바이처, 나이팅게일을 꿈꾸기도 하는데 막상 사회에 나가면 초심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신념을 가지고 있다가도 현실에 부딪히면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물질적인 사회로 바뀌는 것, 그것이 사회의 큰 문제다. 대학교 2학년 외과학 총론 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처음 의대생들 면접을 볼 때 ‘의대에 지원한 이유가 뭔가?’하고 물으면 열이면 열, ‘슈바이처가 되겠다, 봉사 하겠다’는 대답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6년이 지나고 졸업할 때가 되니까 ‘슈바이처가 되겠다,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학생이 한명도 없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사회에 나가면 마음이 변할 것 같아서 학생 때 농활도 다니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처음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고민’을 많이 해봐야한다. 역사책이나 철학책을 많이 읽으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라. 그러면 올바른 정체성이 서고 나름의 가치관이 생긴다. 고민을 많이 한 사람만이 단단한 인간이 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라. 젊음의 힘은 자유와 용기다. 세상은 크고도 넓으니 당장 눈 앞에 것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이 큰 사람이 되어라. 또 삶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 항상 타인과 함께 나누면서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의사, 교수, 촌장님 세 얼굴 가진 곽병은

- 노숙인들의 자활도 직접 돕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갈거리 협동조합을 창립해 노숙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고 들었다
  노숙인 분들은 저축할 줄 모른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다 써버린다. 그래서 노숙인 분들이 돈을 벌어오면 저축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처음에는 통장관리를 도와주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커져서 협동조합이 됐다. 노숙인 분들뿐만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지역 주민들도 다같이 이용하고 있다. 협동조합에서는 병원 치료비가 필요하거나 쉼터에서 나와 독립할 때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 사회복지사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가족들의 불만도 조금 있었을 것 같다. 또 자제 분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겠다는 신조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다
  가족들의 불만이 있었다면 못했을거다. 가족들은 나의 숨은 조력자고 후원자들이다. 집사람이나 애들한테 화려한 집에서는 못 살아도 보통 서민생활만 하자고 말했다. 두 아들에게는 유산은 없다고 미리 말했다. 대신에 공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시켜준다고 약속했다. 


- 요즘 많은 의사들은 피부과나 성형외과 등 편하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분야를 선호한다. 외과나 흉부외과 등 고단한 자리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의학이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행한 일이다. 처음부터 의학도들이 돈을 목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다. 돈 벌려고 의사생활 하면 절대 안 되는데… 안타깝다. 또 최근 의대 학생들의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다고 들었다.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마인드도 바꾸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의대에 가서 강의를 할 때도 학생들에게 항상 1등은 되지 말라고 한다. 꼴찌가 되더라도 마음이 따뜻한 꼴찌가 낫다. 1년 낙제해도 상관없다. 당장 눈앞의 1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부만 하려고 하고 돈만 많이 벌려고 하고 욕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 그래도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대학 동기들을 보면서 부럽지는 않았나. 한 번쯤은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을 것 같은데
  현실의 유혹은 전혀 없었다. 친구들 인생은 친구들의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거니까. 대학생 때 세운 나의 정체성 덕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생각했던 길을 똑바로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 곽병은이 생각하는 봉사란
  봉사의 첫걸음은 남을 존경하는 것이다.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주면 절대 안된다. 동정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봉사의 시작이다.


- 평생을 봉사와 함께 살았다. 얼마 전에는 ‘갈거리 사랑촌’의 개원 20주년을 맞았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그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스스로 많이 기특하다(웃음). 젊어서 가졌던 푸른 꿈을 잃지 않고 실천한 내 자신에게 고맙다. 한편으로는 자꾸 시설이 커지고 봉사자보다 운영자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설이 커지는 것은 싫다. 작은 사람, 운영자보다는 봉사자가 되고 싶다.

 

글·사진 정소윤 기자 abc@cauon.net

 

▲ 곽병은 원장(가운데)과 사모님(맨 왼쪽)의 모습. 그리고 부부의원 식구들의 모습.

곽병은, 그가 걸어온 길
  1971년 중앙대 의과대에 입학해 1984년 중앙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원주국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1989년 부부의원을 개업하고 원주에 새 둥지를 텄다.
  젊은 시절부터 사회봉사 활동에 깊은 뜻을 품고 있던 곽병은 원장은 1991년 독거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갈거리 사랑촌’ 설립했다. 시설이 커지자 이를 원주 가톨릭사회복지회에 기증하고 지금은 운영자가 아닌 봉사자로서 돕고 있다.
  1997년에는 원주 시내에 노숙인을 위한 ‘십시일반’이라는 무료급식소를 차렸다. 이 무료 급식소의 하루 평균 이용자는 110명. 이용료는 200원이다. 이 밥값마저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나눠주고 있다.
  그 후에도 노숙인을 위한 ‘원주 노숙인 쉼터’, 독거노인을 위한 ‘봉산동 할머니의 집’을 차례로 설립하며 소외된 이웃들의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여러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한편 가톨릭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 틈틈이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수료했다. 시설이나 단체 운영과 관련한 것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시작한 늦깎이 공부 덕에 ‘갈고리 노동조합’이라는 국내 최초 복지형 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지금은 상지대와 연세대 원주 의대에 강의도 나가고 있다.
  1991년부터 15년간 원주 교도소의 보건의료과장으로 재직한 곽병은 원장은 재소자들의 인권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대한의사협회와 보령제약이 수여하는 보령봉사대상, 보건복지부가 수여하는 이달의 복지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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