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에서도 복지에 관한 관심이 크게 늘면서 복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국가의 핵심적인 기능과 역할 중의 하나인 복지서비스에 관한 인식이 21세기 들어서 늦게나마 새롭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복지제도가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없다. 그리고 복지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복지도 발전할 수 없다.


현대적인 복지제도와 복지이념은 역설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등장했다. 미국의 주요 복지제도는 대공황 시기인 1930년대 도입되었고, 현대적인 복지이념을 제시한 비버리지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작성되었다. 독일은 산업화와 통일국가 형성을 둘러싼 1870년대에 가장 먼저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본질적으로 복지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도입된 것이 아니라 경제위기나 정치적 혼란기에 도입되었다. 또한 스웨덴을 포함한 북구에서도 전쟁복구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복지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사실은 비버리지 보고서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1942년 11월 20일 영국에서 윌리엄 비버리지 경이 비버리지 보고서로 잘 알려진 ‘사회보험과 통합 서비스(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시기는 한창 독일과의 전쟁이 심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1941년 6월 10일 영국 정부 내 모든 부처들을 망라하는 범부처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 후 1년 5개월 뒤 전후 영국 복지의 틀을 만들고 전 세계 복지국가 논의의 틀을 제공한 역사적인 비버리지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이었고, 전쟁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인하여 재정난을 겪고 있었지만 복지국가를 내세우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을 보호하는 새로운 영국을 그리는 보고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왜 가뜩이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어려운 시기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엄청난 주장을 내세우는 파격적인 복지개혁안이 나왔을까? 복지는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이후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비버리지 보고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일 것이다. 


비버리지 보고서가 핵심적으로 내세운 내용은 사회보험을 통한 국가복지로 사회보험을 통해서 결핍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득안전(income security)을 보장하는 것이다. 해결해야 할 과제는 결핍뿐만 아니라 질병, 무지, 불결함과 나태함이지만, 결핍은 수입의 단절이나 상실에 대응하는 국가 보험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 수, 출산, 결혼과 사망 등과 같이 특별한 지출이 필요한 경우를 고려하여 사회보험이 운영되어야 하며,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실업, 산업재해, 질병과 퇴직 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득상실에 대응해서 실업보험, 산재보험, 의료보험, 노령연금이 제안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소득을 보장하는 복지제도를 제안한 것이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기 3년 전에 등장한 비버리지 보고서는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서비스 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공공서비스를 통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을 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이건 서비스국가이건 중요한 것은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핵심적인 기능이 된 것이다. 


복지국가(the welfare state)라는 용어도 2차 대전 중에 등장했다.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템플이 호전적인 전쟁국가(the warfare state)인 독일과 대비해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영국을 복지국가(the welfare state)라는 용어로 대비시켰다.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독일의 침략과 같은 외부의 위협뿐만 아니라 실업, 빈곤, 장애와 질병과 같은 배부의 위협이라고 보고, 복지국가는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며, 복지국가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국가라는 점을 내세웠다. 국민이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국가가 바로 복지국가라고 본 것이다.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복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가, 그러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기에 복지국가라는 담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현대 복지국가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보여주었다. 과거 국가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였다. 국가권력이 소수의 권력집단에 의해서 독점되고, 자의적으로 국가권력이 행사되기도 하였다. 선거제도가 있지만, 4~5년에 한번 정도에 불과하여, 실질적으로 권력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 나치의 경우처럼 국가권력이 사유화되고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전쟁을 일으키면서 국민의 삶을 유린하기도 하였다. 전후 복지국가는 현물 급여와 서비스를 통하여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로 국가 기능이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선진국이라 함은 국민이 실질적인 국가권력의 주인이며, 국가가 국내외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주된 역할이 된 국가를 지칭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현저하게 약화되었지만, 내부로부터의 위협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실업, 빈곤, 질병, 노령, 범죄,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삶의 불안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현대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 되었다. 더 나아가 사전적으로 실업, 빈곤, 질병 등을 예방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짝을 이루는 적극적 복지제도가 발전하였다. 그리고 기혼 여성들의 육아, 보육, 탁아, 교육 등의 부담을 덜어서 경제활동에 더 쉽게 참여하게 하는 가족복지제도도 크게 발전하였다. 가족복지가 발전한 사회들에서 출산율도 높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높은 새로운 현상도 나타났다. 출산율과 경제활동참가율이 서로 역의 관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의 관계를 보이는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복지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안보의 핵심이다. 이제 국민을 대상으로 복지 서비스 제공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 관점에서 복지는 권리의 대상인 것이다.

 

1부  왜 복지인가

① 복지는 현대적 의미의 국방이다

2부 신 자유주의 물결 속의 복지
① 식코, 미국식 복지
② 북유럽식 복지는 실현가능한가

3부   한국의 복지
① 선택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② 가족 중심의 복지패러다임과 한계
③ 복지는 성장을 저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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