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이 변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없었던 건물들이 들어섰고 새로운 이름의 학과들이 생겼으며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영신관과 신축된 약학대학 사이 잔디광장 앞쪽으로 새로 새긴 학교이름이 마치 출발 호령을 기다리듯 직립해 있다. 이렇게 변신한 외모에 호응하여 우리 대학의 내면과 교육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말∼80년대 초와 비교하면 요즘 대학풍경은 많이 발전(?)했다. 소풍처럼 즐거웠던 휴강은 강의평가에 쫓겨나고, 휴게실에서 바둑으로 한담(閑談)하던 교수들은 연구실 문을 잠그고 논문생산에 열중하며, 보직교수들과 직원들은 대학순위의 막대그라프를 끌어올리려고 계절을 잊는다. 대학 고객인 학생들도 옛날과 다르다. 미팅보다는 학점과 ‘스펙’ 관리에 더 관심을 쏟고 취업걱정이 나라걱정에 앞선다. 이들의 학업능력과 경쟁력은 뛰어나다. 내가 작년 연구년 동안 강의했던 네덜란드 레이든(Leiden)대학 학생들과 비교해 봐도 우리 학생들은 이미 세계대학랭킹 100위 안쪽 수준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대학의 외형과 구성원들의 목표는 변했지만 본질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과연 대학은 기득권을 확대재생산하는 취업공장인가 사회변혁의 지렛대인가? 대학 교수는 독립적인 지식인인가 혹은 회사실적에 목을 매는 또 다른 샐러리맨인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등록금을 매개로 ‘교환’되는 것은 대차대조표를 해독하는 능력과 자동차를 움직이는 노하우인가? 이렇게 훌륭하고 착한 학생들은 왜 ‘88만원 세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졸업 후의 암울한 미래는 ‘아프니까 청춘’인 대학생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정치권력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부패와 이기심 탓인가? 이런 (학기말 시험에서 물어 볼 수 없는 쓸데없는!) 질문들에 대해 사색하고 성찰하기 위해 대학은 아직도 존재한다.

  운 좋게 대학선생 자리를 얻은 후 지난 십 여 년 동안 나는 가능한 더 많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이 쓰게 하고 더 많은 대답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양적인 증가는 질적인 변화를 동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혼자 열심히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학생들이 질문하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학생들이 절실하게 배워야 할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방법이다. 질문이 앞장서지 않는 변화는 아류(亞流)를 잉태할 뿐이다. 멀리보고 크게 생각하는 근육의 힘과 혁신적인 상상력은 본인 스스로 제기하는 의문과 탐구심으로 성숙된다. 샘처럼 솟구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판적인 질문은 바보 같은 주장과 틀린 대답을 항상 이기기 때문이다. 

육영수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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