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정치 철학과 윤리학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시작한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직들과 이 조직의 규제 원리인 윤리와 법은 인간의 본질, 욕망, 능력, 한계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연역된다.
다시 말해, 일단 인간을 정의한 다음에, 이 인간 존재가 이상적으로 살아갈 사회에 대해서 정의하는 방식을 취한다. 루소가 불평등 기원론 에서 이 방식을 취한다. 그는 자유, 자존, 자기애(amour de soi), 타자를 위한 동정심을 인간의 본질로 정의한 다음, 현존 사회는 이 본질을 타락시킨 과정의 필연적인 귀결임을 주장한다. 후속 작품인 사회 계약론 , 에밀 에서는 인간 존재가 행복할 수 있는 가능 조건을 가진 사회를 그려낸다. 그러나 현대 사회 이론들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인간 존재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고안된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적 본질이 실현될 가능 조건인 이상적 사회 또한 지반 붕괴라는 위기에 처한다. 지반이 붕괴된 이상 이상적인 사회로서의 유토피아는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이나 과거를 미래에 투영하는 것이지 결코 새로운 기획이라고 보기 어렵게 된다.
현대 사회 이론에서 인간은 사회적 구성물
18세기에 붐을 이루어서 19세기까지 지속된,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는 루소적 계몽이 남긴 유산이다. 이리가레이와 같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는 루소의 계몽적 기획에서 사회 계약의 당사자는 인간 일반이 아니라 남성에 국한되었다는데 주목한다. 계몽적 유토피아는 비이성적인 요소를 평가절하하고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통제, 조작, 파괴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가득차 있다. 그녀가 보기에, 오늘날의 시민적 권리들은 재산, 이윤, 다양한 유형의 자본 등의 영역에서만 거의 배타적으로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권리들은 재산을 소유 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존재 ·여성과 남성’와, 이러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생각에 기초한 개인들간의 관계 와는 무관하다. 여성의 권리는 여성 자신들이 평등의 이름으로 획득한 권리들을 여성으로서의 자신들만의 정체성에 맞추어 만들 수 있도록 정의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중성적 개인들에 적용되는 추상적 권리들을 대신하여 이 두 성에 적합한 권리들을 다시 정의하는 것, 이러한 권리들을 법률과 어떤 종류의 국내 혹은 국제적 인권 선언을 구성하는 헌장으로 간직하는 것이, 여성들이 이미 획득된 권리들을 유지하고, 이것들을 다시 강화하고, 여성 정체성에 특수한 다른 권리들(육체적, 도덕적 신성, 시민적 혹은 종교적 보호 감독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성애의 권리, 여성 자신의 특수한 문화에 대한 권리, 등등)을 더 많이 획득하는 최선의 길이다.
유토피아적 공상주의 루소적 계몽이 남긴 유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는 수많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미래를 반영하는 문예물들을 만들어냈다. 조안나 루스의 여성 인간 The Female Man (1975)은 남자들 없이도 행복하게 삶을 꾸려가는 여성들을 묘사하고 있다. 시대말의 여성 (1976)은 여성이 실험실 복제 기술을 통해 출산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들이 여성처럼 모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예견하고 있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린 작품들도 홍수를 이루었다. 마가렛 앳우드는 하녀 이야기 (1986)에서 여성이 남성의 노리개나 번식 기계로 전락하는 미래를 그린다.
디스토피아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현존하는 여성의 조건이 미래에도 더욱 강화된 형태로 재현될 것임을 예언한다. 그러나, 이리가레이의 유토피아 기획에서, 미래는 확정되거나 분명한 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예물들은 유토피아를, 긍 정적이든 아니든, 정태적인 완성품으로 간주한다. 이리가레이는 현재를 미래에 투사하지 않고는, 미래에 대한 지도를 그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담론이든 현재를 이해하는 의식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새로운 미래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여성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가로막는 족쇄를 끊어야 한다.
여성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녀는 이 족쇄를 하나뿐인 성을 강제하는 서구 문화에서 찾고 있다. 여성은 작거나, 열등한 남자로만 인식되어 왔을 뿐이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여성의 요구는 무시된 채, 여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의 보완물, 이면(the Other Side), 혹은 부정적 측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이 억눌렀던 욕망을 주제화한 프로이트마저도, 결핍 구멍이란 은유를 사용해서, 여성의 유일한 욕망은 페니스를 갖는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여성의 성을 남성 성 경제에 필요한 보완물 혹은 반대물로 구성한다. 프로이트가 여성성을 남성 사회에 적합한 범주로만 사고하는 이유는 프로이트 자신이 아직도 형이상학적 전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이는 법칙을 부여하고 제반 과학의 메타 담론을 구성함으로써 주인 담론임을 자처하는 철학적 담론에 대한 분석으로 향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남근의 존재와 부재를 깨닫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각적 인지를 통해서인데, 그녀는 철학의 중심 범주인 동일성이 시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촉각이나 후각은 대상에 근접하지 않고서는 인식을 가져다 줄 수 없는 반면에, 시각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성의 빛이라는 철학적 은유는, 다른 사물들에게 대상성을 부여하지만 막상 광원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은폐한다.
루소적 유토피아관의 극복이 타율적 여성관의 극복열쇠
질료나 몸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철학적 염원도 세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철학적 욕구에 다름 아니다. 세상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하는데, 육체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은 세상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다. 세상 속에서 위치한 몸을 가지고는 세상을 응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적 기획은 방법적 회의를 통해, 육체가 가진 성적 차이로부터 단절된 보편적 정신에 대한 서사로 나아간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유난히 보는 것을 중시한다. 눈은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 사물을 객관화하 고 지배한다. 그것은 거리를 설정하고, 유지하려 한다. 우리의 문화에서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우위에 둔 것은 결과적으로 신체적 관계를 빈곤하게 만들었다. ……시각이 지배하는 순간, 몸은 자신의 물질성을 상실한다.
이리가레이는 시각의 논리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시적이며, 또한 가까이 있는 것과의 접촉에 의지함으로써 추상적 은유보다는 인접성에 의한 환유적 글쓰기로 특징되는 여성의 촉각적 특징을 부각시킨다. 여성은 보는 것보다는 만지는 것으로부터 쾌락을 느낀다. 시각의 논리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중심과 거리를 요구했다면, 촉각의 논리는 근접성과 탈중심을 그 특징으로 한다. 만약, 손이 중심을 고정시키고 있다면, 만지는 대상은 파편적인 정 보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손이 중심을 움직이면서 대상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면, 대상은 나에게 형태를 가진 것, 의미체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여성성은 차이를 조직적으로 부인하는 중심과 거리를 거부함으로써만 확립될 수 있다.
보편적인 평등 모델이 진보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루소적인 유토피아적 기획에서는 여성이 사회뿐만 아니라 남성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주체로 자리잡을 공간이 부재하다. 루소 또한 성적인 차이를 인간 일반의 평등 속으로 환원하는 시각주의적 전략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의 유토피아는 한 명의 남성 주체만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리가레이의 유토피아적 공간 속에는 서로 대화하면서 살을 맞대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강 범 석 <성균관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