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때 우리의 후각을 자극했던 아카시아꽃도 지고 있다. 꽃의 향기도 향기이지만 5월의 초여름 햇살에 여린 속살까지 내보이며 바람에 살랑대는 연녹색 나뭇잎들의 군무를 보노라면 과연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발견한 이 아름다움이 어디서 온 것인지 헤아리기 힘들다. 허만하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풍경이란 수동적으로 눈에 비치는 영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정신이 발견하는 체험의 결과”라는 점에서 인간 정신과 세계와의 빛나는 조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토요일 학교 뒷산길을 걸으며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시인이자 화가였던 그가 쓴 시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시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사소한 것에서 삶의 이치를 발견하는 것이 시인이라면, 블레이크는 위대한 시인이다. “자연과 예술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언제나 가장 사소한 것이다”라는 그의 말도 우리가 눈길을 주지 않는 그 작고 사소한 것에서 우주의 진리가 담겨 있음을 말해준다. 다음 구절은 더욱 철학적이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이 담겨 있으며 / 한 순간에 담긴 영원을 보라”(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 And Eternity in an hour) 작은 손바닥과 짧은 시간에서 무한과 영원을 느낀다면, 도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시적 상상력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의 통찰이 단지 자연과 우주로만 떠다니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곧장 우리의 삶으로 눈길을 돌리며, 새장에 갇힌 작은 울새에게서 천국의 분노를 전하고, 굶주려 쓰려진 개를 보고 국가의 몰락을 예견한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울새는 천국을 분노케 하고,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시인의 감수성은 어느덧 국가의 역할을 되묻고 있다. 자유가 억압당하고 굶주림이 만연한다면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19세기 초반을 살았던 블레이크는 버려진 들꽃과 작은 울새에게서 천국을 발견하고 국가의 역할을 탐문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블레이크의 질문은 유효하지 않을까? 과연 국가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자살율 세계 1위, 대학입시에 찌들려 한 해에도 160여명의 고등학생이 자살하는 나라, 육아와 교육이 두려워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나라, 40대 가장의 절반 이상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려고 하는 나라, 도박(경마, 경정, 카지노)를 세금원으로 삼는 나라, 박사학위를 가진 고급인력이 생존문제에 시달리다 삶을 포기하는 나라, 그리고 가계소득의 4분1이나 되는 대학등록금으로 인해 사실상 교육평등권이 실종된 나라. 물론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지만, 산업화 시기의 가치를 상실한 21세기 한국에서 블레이크의 저주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최영진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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