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은 곧 욕망한다는 것, 욕망은 나날의 일상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증거다. 그런데 욕망의 동물이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이 같다고 해서 그 욕망의 풍경까지 같지는 않다. 특히 성적 욕망은 가장 내밀한 것인 만큼, 남성과 여성에게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거칠게 말하면, 남성의 성적 욕망이 공격적인 데 반해, 여성의 욕망은 상대적으로 조심스럽다. 남성의 경우,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트려야 하는 진화의 방향에 맞추어 욕망을 드러내는 일에 억압이 적다. 따라서 남성의 성욕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인’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임신과 출산의 부담을 떠안은 여성들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여성에게 성이란 자기 안에 새로운 생명체를 갖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분신(分身)인 그 생명체는 여성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의 뇌 실험 결과에 따르면, 여성이 자식을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는 스스로를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곳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성의 성욕은 그러니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의 성격이 강하다. 성욕과 관련해 여성과 남성의 언어가 갈라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1993년 칸 영화제 대상 수상작 <피아노>는 바로 그런 여성의 언어를 다루고 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심했던 빅토리아 왕조의 19세기 말, 여주인공 아다는 어린 딸을 둔 여인으로 변방 뉴질랜드로 팔려오듯 시집을 온다. 말을 잃고 오로지 피아노로만 소리를 내는 아다에게 피아노는 곧 그녀의 언어다. 그런데 얼굴도 모른 채 만나서 함께 살게 된 남편 스튜어트는 그런 아다의 피아노를 이해할 수도, 이해할 생각도 없다. 그는 자신의 언어만을 고집하고 강요한다.


남편과 소통할 수 없는 아다는 그럴수록 피아노에 빠져든다. 한밤중에 잠꼬대하듯 피아노 연주를 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스튜어트에게 아다의 피아노는 오히려 일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는 가구를 팔아치우듯 피아노를 처분한다. 아내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 피아노를 이웃이자 친구로 원주민의 핏줄이 흐르는 베인스가 사들인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무언가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베인스는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언어인 피아노를 쫓아 베인스를 찾아가는 아다.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아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베인스. 그는 피아노 소리에 실려 나오는 아다의 감정과 영혼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처럼 말 없이도 피아노를 통해 서로를 확인하고 소통하게 된 아다와 베인스는 마침내 마음을 넘어 몸의 소리를 듣는 데까지 이른다. 피아노 소리를 타고 마음을 이해하듯 아다의 몸과 존재의 소리까지 듣고자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말인 피아노 때문에 보상으로 몸을 허락한다고 생각한 아다는 베인스가 피아노를 주겠다며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말을 들어준 베인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아다는 피아노와 상관없이 베인스를 찾아가고 그를 원한다.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다에 빠진 피아노를 버리고 베인스에게 돌아가는 아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한 여성의 당당함을 볼 수 있다.


베인스가 아다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약자인 여성의 욕망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 덕분이다. 욕망은 그래서 주체의 욕망을 넘어, 약자, 소외된 자, 즉 타자의 욕망을 느끼고 이해하는 데에 이르러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 그러니 욕망은 나를 주장하는 데서 머무는 게 아니라, 너를 받아들여, 나-너의 ‘관계의 윤리학’이 될 때까지 성숙해야 하는 것이다.


‘욕망사전’은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 욕망에 관해 탐구하는 꼭지입니다. 욕망이란 어둡고 부끄러운 대상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필연적이지만 은밀한 욕망은 여러 작품들의 주요한 소재가 되곤 합니다. 따라서 여러 서사작품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살펴보며 욕망의 본질에 접근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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