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기 위한 각 분야의 움직임으로 요즘 우리 주변은 술렁이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라도 주춤거리면 금방 도태될 듯한 분위기다. 이런 변화 속에서 올해로 창간 52주년을 맞이한 중대 신문은 지난 2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 보면서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80년대부터 시작한 이번 기획은 사회적 변화 속에서 대처한 중앙대학교,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한 중대신문을 살펴 보았다. 특히 90년대에 벌어진 다양한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
<편집자주>

4·19 혁명 이후 1980년대 한국의 반정부 운동은 학생운동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유신독재가 붕괴함에 따라 대학가에는 여러 가지 상황 변화가 감지되는 실정이었다. 지배권력이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신독재의 붕괴로 사기가 한껏 올라있는 학내에 군부대나 경찰을 투입한다는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다.

사실상 해방구가 된 대학은 공공연하게 교내 집회를 가질 수 있었음은 물론, 각종 학습모임 또한 공개적으로 회원을 모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학생자치기구이자 투쟁기구인 학생회의 부활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찌꺼기를 걷어낼 학원자주화투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은 신군부의 학원탄압도 그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더욱 요원한 것이 되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 원리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직접적으로 선출되지 못했으며, 의회는 권력의 들러리로 전락하였고, 야당은 권력유지를 위한 장식품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게다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심하게 제약됨으로써 학생운동 세력을 비롯한 반정부 운동세력은 체포·감금·추방되었으며 야만적인 고문과 테러가 자행되었다.

80년 5월에 접어들면서 서울을 필두로 민주화와 비상계엄의 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고양되었다. 학생들은 학내에서 ‘비상계엄철폐’와 ‘언론자유보장’을 요구하는 집회를 계속적으로 이어 나갔다. 5월 14일 4천 여명의 중앙대 학생은 상도동을 거쳐 시청에 이르기까지 ‘유신잔당 척결’을 외치며 서울의 봄을 이끌었다. 하지만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확대하고 5·18 광주민중 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이 땅에서의 민주화 움직임은 철저한 억압을 받게 된다.

밖으로는 폭압적인 언론탄압과 안으로는 숨통을 죄어오는 학원탄압으로 말미암아 중대신문 역시 안팎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80년대에 접어들어 중대신문은 2캠퍼스에 편집국을 개국하는 한편, 학생 편집장 성명을 게재하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중대신문은 갈수록 성장세를 유지했지만 신군부의 대대적인 언론탄압과 학원탄압에 맞물려 시련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의 예측할 수 없는 정국의 기상도는 사회의 모든 부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급기야는 민주사회의 숨통인 언론의 목을 죄어오게 된다. 일간지는 물론 대학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중대신문의 84년 5월은 학생기자들에 의해 사전 원고검열을 거부하고 편집자율권을 확보하려는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 해였다. 또한 중대신문 반세기 역사의 한 획을 긋는 87년 자유언론투쟁을 통해 학생 기자들은 편집자율권의 보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 4·13 호헌 조치를 기점으로 발생한 6월 항쟁을 시작으로 사회에 잠재되었던 욕구들이 분출되고 89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학내에서는 87년 구재단의 부도와 신재단의 대학 인수로 새로운 운영의 기점을 마련했으며, 학생회·언론사·학회를 중심으로 학원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전대협이 전국적으로 조직되면서 학생운동의 새로운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89년 8월에는 당시 2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 열사의 시체가 거문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이내창 열사 추모사업회(회장:강내희, 중앙대 영문과 교수)를 중심으로 올해 추모 10주기 기제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갖고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80년대가 초고속 경제 성장과 학원 및 정치의 민주화라는 대업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면 90년대는 사상의 다양화와 세계화, 그리고 남북한 통일문제 접근이 지상과제였다. 인권문제가 강하게 대두됐으며 노동계의 민주화 물결도 거세져 현실정치 참여로 이어졌다. 학생운동권도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다양한 창구를 마련하게 된다.

한편 중대신문에 있어서도 90년대는 신문제작에 있어서 다양한 실험과 대학정론지로서의 사명에 충실을 기했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4월 16일자 1면 사립학교법 개정관련공문 단독입수 및 분석, 30일자 현대 중공업 파업사태 관련 현장취재(안문환, 전은자, 구기청 기자 89학번) 등은 일간지에서 후속보도를 할 만큼 취재 및 사안 인식의 면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또한 신문 제작에서도 주2회 16면 발행이 대학신문 최초로 시도되어 대학신문의 취약점으로 꼽히는 신속성의 문제에 과감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2회발행은 93년까지 계속되어 신문사 내의 자체 역량 강화의 토대가 됐다.

한편 90년대는 사회에 자유를 향한 갈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던 한해였다. 현대중공업, 금강노조, KBS, MBC 등 수많은 기업 노조의 대정부 투쟁이 봇물을 이뤘다. 학생운동권의 활동도 활발했다. 남북한 통일을 위한 범주체적 통일운동인 ‘범민족 대회’의 선봉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이후 정부와의 극단적 대립은 많은 인적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91년은 대외적으로 노태우정권에 대한 피와 눈물, 그리고 투쟁의 해였으며 학내에서는 C급대학 판정에 대한 분노와 반성의 해였다.

4월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군의 죽음, 그리고 잇달은 학생들과 박창수씨 등의 분신은 노정권의 작태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으로 서울 50만명 집회 등이 연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5월말 성대 김귀정양이 직격탄에 맞아 사망하는 등 정권의 살인폭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학내는 고요했다. 중대신문에서는 침묵하는 교수들과 점점 무관심해지는 학생들에게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각계의 기고 및 사설을 통해 싣는 한편 정권불신임투표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인 상황 대처 노력을 보였다.

해가 마무리 되면서 진정국면에 접어들어 어느정도 평온함을 되찾은 학원에 10월말 이공계 C급 사건은 대학내 각 구성원들의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반성과 김희수 재단의 학원 육영의지를 강하게 묻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92년은 학내 사안이 주된 관심사였다. 91년 말 C급 사태의 여파는 92년을 ‘학원 정상화’와 ‘대학발전’이라는 명제에 대한 대학내 각 주체들의 활발한 논의와 활동을 불러왔다. 1학기초 총장 사퇴와 재단의 육영의지 확인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급기야 이사장실 등 행정사무실의 점거 및 이사장실 집기를 청룡연못에 투척하는 극도의 불신 상태가 연출되기도 했다. 또 6월 초 재단매각설이 대두되면서 학내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거졌다.

결국 6월 김민하 교수가 총장 직무 대행을 맡고 대학발전협의체계를 구체화시키기에 이른다. 한편 정부의 학생운동 탄압은 공권력의 학원침탈로 이어졌다. 92년 8월 범민족대회 예정지였던 중앙대에 3천5백여명의 전경을 투입하고, 학내에 페퍼포그를 동원하여 1주일간 대학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태재준 전대협의장 및 전대협 핵심간부 70여명이 공대 7층까지 몰렸다가 연행되었고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은 군화발에 의해 초토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같은 힘겨웠던 시기가 지나고 93년엔 김민하 총장이 취임하면서 중앙대는 실질적인 대학발전의 계획을 마련하게 된다. 발전기금사무국이 설치되고 2002년까지의 대학장단기 발전계획안이 수립되 학내는 대학 발전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오르게 된다. 이 계획안에 의하면 2000년에 메디칼센터가 완공이 되며 이는 재단이 전담하겠다고 밝혔다. 현 시점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약속이 되어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학생회의 활동도 수업, 등록금, 학내 복지 등 다양한 부분으로 확대되어 학원의 상아탑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데 제 주체들이 노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90년대 중요한 사건은 문민정부의 수립이었다. 군부 출신의 인사가 아닌 순수 정치인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신한국건설’이라는 거창한 플래카드를 내걸고 말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대학 및 통일세력, 노동자 세력에 대한 탄압은 군부시절의 탄압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94년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문제는 누가 뭐래도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 그중에서도 쌀 시장 개방압력의 문제였다. 그리고 연이은 WTO 체제의 출범에 따라 대외시장 개방압력에 대한 대응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는 자본의 유지/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 우선 논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조금씩 산업구조조정 주장이 제기되어오던 터라, 쌀 시장 개방의 문제는 단지 국산농업의 파행만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IMF 체제 이후 진행된 기업구조조정의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

중대신문은 94년 쌀 시장 개방부터 98년 IMF 구제금융에 이르는 이러한 정세를 거시적인 안목으로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당시의 시국이 민중의 새로운 살 길 모색이 아니라, 단지 자본의 시장독점원리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견해에서 비롯된 혜안이었다. 중대신문의 이러한 작업은 더 나아가 초국적 자본이라는 당시로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들이 개진되면서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응책을 찾는 노력을 요구했다. 98년 IMF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에서 제기된 ‘빈곤의 세계화’ 문제나, 세계노동자 네트워크 설립 등의 목소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중대신문의 견제적인 입장을 잘 대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제기와 대안모색은 현재적인 의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적인 지적 작업이 요청되고 있다.

또한 94년 말, 95년 초에 시작된 민주노총 설립준비 움직임 역시 당시 혼란스런 정세를 우려하던 노동운동진영의 의식을 잘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후 대선을 기점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진보 정당 국민승리21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서 평가될 만한 일이다. 중대신문은 이러한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97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보여진 국민승리21의 모습에 대해 발전적 비판을 말하는 데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가령 당시의 선거운동과 국민승리21의 활동을 토대로 애초에 그들이 목적했던 계급성에 근거한 운동이 사라졌음을 지적한 몇몇의 기획 글들은 선거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본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에서 나왔던 작업이었다.

95년 말 우리는 또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이룩했다. 바로 세계를 놀라게 한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를 비롯한 범국민적 호응 속에서 중대신문 역시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왜곡을 바로 잡고, 사건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노력했다.

학생운동은 96년을 들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전·노구속에 성공하면서 보다 새롭게 제시될 명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학생운동은 학생이라는 본연적 신분에 맞게 교육분야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 와중에 연세대 95학번 노수석군이 집회 도중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바로 연세대 통일대축전이었다. 단일 사건 최대 구속자수라는 ‘신기록’에 맞게 학생운동은 이를 계기로 위기의 국면을 맞는다. 정부의 공안탄압은 물론 제도언론의 왜곡보도라는 거대한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대신문은 새로운 사고방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굳게 믿어왔던 학생운동의 선도성에 대해 재사고할 필요가 있다는 자각이 시작된 것이다.

97년 중대신문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학생운동에 새로운 전기 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는 진보운동진영에서는 물론 전반적인 분위기로 형성되면서 학생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시작됐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대신문은 학생운동의 여러 갈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학생운동 길 찾기는 중대신문이 그동안 담당해온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 태도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97년에는 의대부속병원 건립 문제로 인해 학내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대 학생회는 물론 총학생회 등도 동참해 재단퇴진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소요는 학교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지경까지 번졌는데, 중대신문은 각 구성원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게시판 구실을 함으로써 상황을 진정 국면으로 전환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98년 중앙대는 IMF 구제금융시대라는 경제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연초부터 대학본부는 경영마인드에 입각한 정책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당시 교육부가 추진한 학부제 지침이 학내를 다시 어수선한 분위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학교본부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교수사회는 물론 학생들도 교육부와 학교본부의 처사에 크게 반발했다. 문제는 투쟁의 대상이 교육부가 아니라 밀실행정 혐의를 받은 대학본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대신문은 이에 대해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투쟁의 방향을 바꾸는 데 앞장섰다. 이로 인해 다시 학교는 안정된 분위기를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단과대학별 대학발전위원회 등이 설립되면서 학생 참여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학내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로 여겨졌다.

이제 중대신문은 새로운 전망을 구축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회적으로는 이 땅의 민중들이 가져야 할 의식과 자세의 전형을 제시하고, 학생운동 부분에 있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또한 학내적으로도 학생들의 권익, 학생권의 보장과 실현을 통해 중앙대를 시장의 논리가 실현되는 수동적 공간이 아닌 능동적인 공공영역의 장으로 부흥하게 할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동안 중대신문이 유지해온 ‘시대적 고민을 함께 하며 지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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