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1957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3년 뒤 47세의 이른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2차 대전 직후 출간된 두 권의 책, 소설 『이방인』(1942)과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1942)로 삶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새로운 도덕을 내세우며 전후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부조리’와 ‘반항’이다. 『이방인』이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 당하기까지의 뫼르소의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사상을 허구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시지프 신화』는 이를 ‘추론’하고 ‘증명’한다’. 시지프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신들을 속인 죄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게 되는데, 바위는 산의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그 무게 때문에 다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열정” 때문에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이라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형벌이 바로 인간조건이며 우리 모두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부조리는 삶의 단순한 불합리나 사회의 부조리와 구별된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개념이고 형이상학적 전망으로,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 분리, 통일을 향한 인간의 열망과 그 불가능성은 인간조건의 비극성에서 비롯된다.


부조리는 우선 생각이 아니라 ‘느낌’과 ‘체험’으로 다가온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권태와 더불어 의식이 깨어나고 물음이 생겨난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런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때 익숙했던 일상은 문득 전혀 다른 낯설고 두터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 언덕들, 따사로운 하늘, 이 나무들의 윤곽이 지금까지 우리가 부여해왔던 허망한 의미를 단숨에 잃어버리고서 이제부터 잃어버린 낙원보다 더 먼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감정이다.


부조리는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열망에서 태어난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통일적인 원리에 따라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친숙해지고 싶은 욕구이며 분명한 인식에의 갈망”이다. 이해하려는 우리의 욕구와 절대에 대한 향수가 바로 세계와의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서 부조리가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조금이라도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금이 가고 무너진다.” 다시 말해서 부조리는 나 자신이나 세계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분리된 나와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카뮈의 추론이다. 카뮈가 부조리를 본질적인 진리로 설정하고 자살이나 종교적·이념적 구원에의 희망을 부조리에 대한 해법으로 보지 않는 것도 바로 이처럼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관계 자체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자살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는 것이며, 종교나 이념은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부조리라는 술과 무관심이라는 빵”으로 불확실한 세계를 사는 이방인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가?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매우 역설적이다.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조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버티는 것, 즉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 ‘쓰라리고도 멋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항’이다. 그것은 “절대와 통일을 향한 나의 열망과 이 세계를 합리적이고 순리적인 원리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불가능성” 사이에서 몸을 지탱하고 의식을 유지하는 성실성이다. 뫼르소가 처형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군중의 환호를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을 거부하는 반항의 몸짓이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미래와 구원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 할 길도 없다. 그렇기에 바로 오늘 우리는 사형당하는 사형수로서의 자유와 “부조리의 은총”을 누린다! 부조리를 통해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이처럼 “미래의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 불모의 사고”이며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방인』 해설에서 이 작품을 “찬란한 불모의 소설”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이른바 부조리 3부작(소설 『이방인』, 희곡 『칼리굴라』, 에세이 『시지프 신화』)을 거쳐 카뮈는 ‘반항’을 주제로 한 작품들(소설 『페스트』, 희곡 『정의의 사람들』, 에세이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면서 이 세계와 삶에 궁극적 의미가 없다 해도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 ‘신 없는 성자’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결국 부정의 몸짓은 무엇을 긍정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부정의 철학은 우리를 매료시키지만 긍정의 철학은 기나긴 인내와 고통을 요구한다. 철학자 폴 리쾨르의 말대로 “뜻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나오는 자는 없다. ‘희미한’ 희망은 애도의 사막을 거쳐야 한다.” 부조리에 대한 명철한 의식과 반항, 그리고 자유와 열정을 통해 삶의 무의미는 의미로 바뀐다. 인간만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요청한다.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미를 만들 수 있는 것이며, 삶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주체로서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목련꽃이 이렇게 툭툭 떨어지는 ‘찬란한 불모의 사막’에서 우리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떻게 시지프의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는가? 


“갑자기 나는 사방이 낯설어졌다 / 늘 보던 창이 없고 창에 비치던 낯익은 얼굴이 없다 / 산과 집, 나무와 꽃이 눈에 설고 스치는 얼굴이 하나같이 멀다 / 저잣거리를 걸어도 뜻 모를 말만 들려오고 / 찻집에 앉아 있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뿐이다 / 한동안 나는 당황하지만 웬일일까 이윽고 눈앞이 환해지니 / 귓속도 밝아지면서 / 죽어서나 빠져나갈 황량하고 삭막한 사막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 / 눈에 익은 얼굴과 귀에 밴 말들이었던가 / (...) 비로소 얻게 되는 이 자유와 해방감 /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 또 다른 사막임을 내 왜 모르랴만.” (신경림,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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