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은 유한한 인간의 존재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인간 생명이 어떻게 유한성에 직면하게 되었는가를 반성한다. 그와 동시에 정신적인 수양과 도덕의 실천을 통하여 유한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무한을 추구한다. 그래서 동양철학의 중심문제는 이 세계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하는 우주론과 존재론의 해명에 중점이 있지 않고, 인간의 ‘주체적 삶’의 실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인간 삶의 문제를 서양과는 달리 ‘지식’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수양 실천을 통하여 깨닫고 체득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노자철학도 궁극적으로 인간이 ‘정신적 자유’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 학문을 탐구하는 지식 축적의 방법을 통해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노자는 “위학爲學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고, 위도爲道는 날로 덜어가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어서 무위無爲에 이른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48장)라고 말한다. 이것은 ‘학문을 하는 것(위학爲學)’과 ‘道를 하는 것(위도爲道)’이라는 두 종류의 다른 형태를 지닌 학문이 존재함을 역설하고 있다. 먼저 ‘위학爲學’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과 같은 경험과학에 속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러한 경험학문은 ‘일익日益’의 과정, 즉 축적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지식의 축적 또한 인간들의 욕망의 증가와 연관된다. 현대 학문은 과학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들의 무한 욕망충족을 위하여 기여하는 일면이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의 주된 관심은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과학을 발전시키고 무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다 인간들의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발달이 곧 인간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과학적 지식은 도리어 인간들에게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 그래서 ‘위학(爲學)’의 공부만을 추구하는 것을 노자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위도(爲道)’의 학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하는 어느 학문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가르치고 탐구하는, 이른바 학문의 영역을 잠시 벗어나 우리의 삶의 전체적 영역에서 보면, 위도(爲道) 공부의 중요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인간이 인간이 되는 길’, 즉 진정한 삶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한 우리의 물음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의 방향은 ‘위학’의 방법과 차이가 난다. 그 물음을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경험과학을 포함한 대부분 학문에서 추구하는 지식이 모두 경험에 의존하여 얻어진 것이고, 그러한 것은 자신의 밖에 있는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 대한 지식은 밖으로 물어야 하지만, 나의 생명, 나의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내면으로 돌아와 나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서 ‘위도일손(爲道日損)’은 추구의 방향을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일손(日損)’은 ‘매일 덜어낸다’,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의 세계에서 오는 지식과 감각적 욕망을 반성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도달하는 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경지인 것이다. ‘일손(日損)’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은 자연과학적 의미의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 생활 영역에서 체현되어지는 ‘삶의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고, 실천을 통하여 도달되는 경지의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노자는 바로 인간의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참다운 삶의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자유의 실현과 연관을 갖는 개념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목해야 한다. 흔히들 무위(無爲)라고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또는 현실의 문제를 방기하고 외면하는 현실도피의 사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다. 노자가 제시하는 ‘무위’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비판을 토대로 제기된 개념이다. 노자는 허위의식으로 위장된 가치 규범과 문화를 낳게 하는 원인인 ‘유위(有爲)’에 대한 비판과 부정으로 그의 철학적 출발점을 삼고 있다. 그래서 “억지로 하려고 하는 자는 실패하고, 억지로 잡으려 하는 자는 잃게 된다(爲者敗之, 執者失之)”고 주장한다. 이러한 ‘유위(有爲)’ ‘인위(人爲)’ ‘조작(造作)’에 반대하여 제기된 관념이 바로 ‘무위(無爲)’인 것이다. ‘무위(無爲)’에서 ‘무(無)’를 ‘동사’로 보면, ‘부정하다’ 제거하다’의 의미이고, 그 부정하는 대상은 바로 허위 ,조작, 외재, 형식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의미이다. 그래서 무위를 ‘inaction’으로 번역하거나, ‘부동(不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조작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없으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말 그대로 자연스러워지게 된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自然)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욕(私欲)을 없애버리고 무위(無爲)하게 되면 바로 자연(自然)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自然)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연계의 의미로서 ‘자연(自然)’과 구별돼야 한다. 자연계 중의 현상은 엄격히 말하면 모두 다 다른 어떤 것을 원인으로 하여 그 결과를 가져오는 ‘인과법칙’에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자연계에서 말하는 자연(自然)은 자연(自然)이 아니고, 너는 나에게 의존하고 나는 너에게 의존하고 있는 타연(他然)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노자가 말하는 자연(自然)은 아무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정신적인 독립을 의미하고,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노자가 비록 ‘위학(爲學)’ 공부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위도(爲道)’ 공부만으로도 살아 갈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는 바로 ‘위학’과 ‘위도’가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룰 때, 보다 이상적 삶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지금 생존이라는 이름하에 전쟁터와도 같은 살벌한 무한 경쟁 속으로 사람들을 내몰고 있고, 우리의 교육도 생존을 위한 기술 습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우리의 삶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가 개나 고양이와 같은 짐승의 층차와 무엇이 다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삶의 도구를 획득하기 위한 위학공부도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삶의 의미와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위도공부의 중요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노자는 현세적 삶 속에서 실용(實用)의 가치만을 중요시하고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무용(無用)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사고의 전환과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노자』는 81장으로 구성되어있고, 짧은 경구(警句)로 이루어져 있지만, 문장을 모두 합쳐도 5000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의 지혜로 인하여 하나의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하나의 학파를 이루어, 공자의 『논어』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과 더불어 중국전통사상의 양대 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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