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계를 소중히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잇는 대화에 능하다. 여성이 관계 지향적 존재인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임신, 출산, 육아의 주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단세포로부터 시작해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인간은 많은 부분을 어머니라는 여성과 함께 한다. 여성은 늘 다른 존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게는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존재의 의미이며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남성은 그에 반해 성취 지향적 존재여서, 관계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능력을 발휘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둔다. 가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바깥에 나가 식량을 구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왔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타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협력의 한 형태이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결실을 얻는 일이 아닌 한 함께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가족에게 건넬 성과물의 획득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장으로서 정체성이 남성을 성취 지향적 존재로 진화시켜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적 차이는 실제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백화점이라는 실험 공간에서 남성은 백화점을 찾아가는 길에 관심을 쏟고, 여성은 백화점 안에서 자신이 관심을 둔 매장의 공간적 위상과 물건들의 배치상황을 파악하는 일에 더 뛰어나다고 한다. 그것은 남성이 원시수렵사회 이후 사냥의 주체로 자신을 진화시켜온 반면, 여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관리와 함께 채집생활의 경험을 유전자 속에 간직해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성(性)에 따른 이런 차이에 대한 설명은 진화심리학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냐는 반론이 있다. 게다가 실제 개별 존재의 성격 파악에 있어서는 상황에 따른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에 과도한 일반화는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진화심리학의 통찰에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남성과 여성을 떠나 인간의 역사에서 경쟁과 시샘의 감정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너보다는 더 뛰어난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것이 긍정적일 때에는 자신을 더 끌어올리는 성취의 에너지가 되지만, 부정적이 될 때는 타인을 끌어내리려는 음험함이 된다.


영화 좰아마데우스좱는 1980년대 초에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오스트리아의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평생 신에게 기도하며 신에게 바칠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의 앞에 음악적 재능이 더 뛰어난 모차르트가 나타난다. 살리에리가 보기에는 경박하고 신앙심 없는 모차르트에게 신은 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부여한 것이다. 그 아이러니 때문에 살리에리는 시샘의 감정에 휘말리며 모차르트의 음악적 성공을 방해하고, 결국 모차르트는 낙담과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다.


사실 이 영화는 실제의 전기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절망 속에서 30대 중반에 요절한 것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그의 음악적 성향을 좋아하지 않은 탓이지, 살리에리의 시샘에 따른 음모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스승이 되었다.


그럼에도 좰에쿠우스좱의 작가 피터 쉐퍼는 그 두 남자의 경쟁 심리를 주된 갈등의 축으로 삼아 뛰어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허구(虛構)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안에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이 두 남자의 성취 지향적 욕망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나를 밀어 올리는 긍정의 에너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너를 깎아내리는 부정의 에너지가 될 것인가? 경쟁은 이처럼 두 얼굴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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