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자유선진당 대표실
멀고 크게만 느껴졌던 국회의사당. 그곳에 들어가기란 역시 쉽지 않았다. 공항을 방불케하는 보안 시스템은 기자를 입구부터 경직되게 만들었고 당 대표실의 커다란 문 앞에 서는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기자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환한 미소로 악수를 청하는 변웅전 대표가 있었다.

-자유선진당 대표로 취임한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중앙대학교의 ‘의와 참의 정신’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는 선후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당 대표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에요. 어깨가 무겁네요. 중앙대의 가르침처럼, 부드러운 것이 강함을 이긴다는 ‘유능제강’의 마음으로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폭넓은 정치, 통합과 화합의 가치를 펼쳐 나갈 것이에요.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당 대표로서 앞으로 어떤 정치를 펼쳐나갈 것인지

억울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부자보다는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수 있는 그런 정치 말이죠. 큰 마켓이나 백화점보단 재래시장이나 노점상을 더 챙기는 정치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실패라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 경우도 많고요. 실패하고 낙오한 사람들이 다시 재출발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꿉니다.

-중앙대 심리학과 58학번 입니다. 어떤 학생이었는지

저는 대학시절에 마음껏 놀고 공부도 마음껏 했던 학생이였어요. 제 전공은 심리학이지만 신문방송학을 복수전공 했죠. 선택과목을 폭넓게 선택한 학생 중 한명이였어요. 그렇다고 공부만 한 것은 아니였어요. 제 키가 182cm인데 그 당시엔 현재의 192cm 정도의 대우를 받았죠. 상대적으로 키가 컸기 때문에 남자들 사이를 제압하곤 했어요. 얼굴은 곱상한데 손은 조금 거칠잖아요. 놀 때도 후회 없이 놀았습니다. 그렇지만 전과자는 아니예요(웃음).

-학창시절 4·19를 겪었습니다. 많은 추억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청와대 앞이나 을지로 입구, 내무부 앞, 광화문에서 시위가 발생했어요. 그 시위를 제지하던 계엄군은 땅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있었죠. 그래서 학생들이 가까이 진군할 때마다 부상자가 속출했어요. 친구 중에도 부상자가 많았고 피 흘리는 친구를 엎고 달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또 계엄군은 골목을 향해 총을 발사했어요. 학생들이 주로 골목으로 도망을 치기 때문이예요. 그 사실에 저는 분노했어요. 그래서 다음날 청와대 앞으로 진격을 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요즘, 4·19 민주화 운동의 정신이 퇴색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제가 학교 다닐 당시 한강 인도교가 폭격으로 인해 끊어졌어요. 그래서 강북에 있는 사람들이 학교에 가려면 굉장히 불편했죠. 끊어진 인도교를 대신해 드럼통으로 가교가 만들어졌고 그 위를 통과해야만 했어요. 가교를 통과한 후 다시 버스를 타야지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죠. 얼마나 고생이었겠어요(웃음).

-최근 중앙대 법인교체 이후 많은 변화가 있는데요,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우선 훌륭한 재단이 들어와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재단, 학교, 동창회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가 돼서 오직 학교만을 위해 희생·봉사해야 하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은 학교를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도울 것인가 각자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일환으로 보건복지위원장을 하면서 중앙대의료원에 35억 5000만원을 연구기금으로 지원하는데 노력한 적이 있어요.

-국회의사당 내 중앙대 동문모임을 이끌고 있는데요, 모임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국회의사당 내에 ‘국중회’라는 모임이 있어요. 제가 회장직을 맡고 있죠. 국회의사당에 근무하고 있는 중앙대 학부 및 대학원 졸업생 약 40여명이 함께하고 있어요. 자주 모임을 갖고 학교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논하는 모임이예요.

-중앙대 동창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동창회장직을 맡을 의향이 있으신지요

학교와 재단 그리고 동창회가 삼위일체 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인 것 같아요. 동창회는 학교에 바라지 말고 후배들을 위해 희생·봉사해야 돼요. 이러한 희생정신이 있다면 동창회가 제 역할을 할 거예요. 제가 동창회장을 맡으면 우선 학교를 위해 재단을 독려할 것이예요. 재단이 바뀌면서 약속했던 부분들을 이행할 수 있도록 말이죠. 전 ‘약속’을 중요한 미덕이라 생각하거든요. 이것이 의와 참의 정신 아니겠어요(웃음). 그리고 동문 한 분 한 분이 학교를 자주 찾을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과 용기도 불어넣어주고 이끌어줄 수 있도록 해야죠. 특히 먼저 사회에 진출해 있는 선배들이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각 분야를 중앙대가 재패해야죠. 또 중앙대는 스포츠 강교잖아요. 농구를 확실히 지키고 여자 골프와 같은 종목도 더욱 발전시켜 세계 각국에 중앙대를 알려야 해요. 제가 입학 당시 중앙대는 명문 사학 중 3강이였어요. 다시 그 위상을 되찾아야 할 것이고 계속해서 중앙대 출신들이 당대표 그리고 대통령까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나운서로 활동했었습니다. 인기가 굉장했는데요

신문방송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기에 꿈을 키울 수 있었어요. 제가 말이 느리기로 유명한 충청도 출신이여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했죠. 당시 버스는 높이가 낮아서 제가 버스의 공기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가야 했어요. 그래서 간판들을 보고 또박또박 읽는 연습을 하기도 했어요. 어떤 날은 세 분의 아주머니가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안됐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또 관중이 없는 효창구장을 찾아 중계방송을 연습하기도 했어요. 특히 겨울엔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고생 끝에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죠. 저는 아나운서로서 인기가 있었어요. 요즘은 각 분야마다 특화된 아나운서들이 있지만 그 당시엔 ‘잘 나가는’ 사람이 모든 프로그램을 장악했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TV를 틀면 나왔으니까요(웃음). 개그맨 유재석이 저의 진행을 수백 번 봤다고 하더라고요. 뿌듯해요. 제가 주례를 봐주기도 했고요. 얼마 전 MBC 50년 방송사에 가장 존경받는 아나운서로 헌정되기도 했어요. 너무 기뻤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김종필 전 총재의 영향이 컸어요. 김종필 총재는 젊은이와 호흡할 수 있는 인기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며 저에게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죠. 처음엔 거절했어요. 화려한 무대를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김종필 총재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한다. 그러니 함께 해달라’는 것이였죠. 그의 설득이 없었다면 전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민들의 사정을 따뜻한 손길로 살펴주고 억울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죠. 그런 정치를 하고 싶고 그 정치의 정점에 서고 싶어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꼭 당부 하고 싶은 것은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놀 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땐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하고,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는 멋진 대학생이 되었으면 해요. 제대로 놀지도, 공부하지도, 젊음을 불태우지도 못하는 그런 대학생활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고 안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은 사치예요.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로 해야 하죠. 그렇게 해서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거예요(웃음). 또한 ‘핸디캡이 곧 인센티브’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말이 느리기로 유명한 충청도 사람이 아나운서가 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다. 하지만 죽을 각오의 노력 끝에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후배들도 죽을 각오로 열심히 임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이은샘 기자 SAEM@cauon.net

사진제공 자유선진당 대표실
변웅전

2011. 05~ 자유선진당 대표

2008 제18대 자유선진당 국회의원(3선)

1995~1996 MBC 프로덕션 대표이사 사장

1988~1991 MBC 아나운서실 실장, 방송위원

1963~1969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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