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보수적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실시한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 조사 결과 한국은 196개국 중 70위를 기록했다. 더군다나 지위도‘언론 자유국’에서‘부분 자유국’으로 강등됐다. 이런 언론 환경에  분노하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송준영씨(신문방송학과 4)다. 그에게 언론은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으로 나뉘지 않는다. 언론에 대한 그의 기준은 ‘올바름’이다.>

무식과 무능의 사회를 일깨우는 언론인을 꿈꾸다

10초 만에 등극한 스타의 자리 
 그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2009년 11월 20일,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100분 토론’ 출연이 이렇게 반향을 일으킬 줄 몰랐다.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는 짧은 질문이 그를 세상에 노출시켰다. ‘나경원을 망신시킨 당돌한 대학생'이 된 그는 순식간에 야당의 ‘잔다르크’로, 여당 최대의 적이 되고 말았다.
 

 그가 100분 토론 15기 시민논객으로 활동할 때였다. 미디어법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던 시절, 100분 토론 제작진도‘미디어법’이라는 매력적인 주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2009년 11월 20일 밤 12시 15분, ‘미디어법’을 주제로 100분토론 방송이 시작됐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을 비롯해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현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 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패널로 참석한 자리였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15기 시민논객들은 사전토론을 가졌다. 수십 명의 시민논객 중, 가장 탄탄한 주장과 근거를 가진 사람에게 질문 기회가 주어졌다. 그가 기회를 낚아챘다.

 그는 나경원 의원에게 미디어법 재논의에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헌재 사무처장이 ‘헌재 결정문에 미디어법이 유효하다는 부분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헌재 결정을 존중해 미디어법에 대해 재논의 할 의사가 있습니까.” 그러나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 의원은 “사무처장의 의견은 헌재의 의견이 아니다. 헌재는 미디어법이 유효하다고 결정했다”고 답했다. 논점이 미디어법의 재논의에서 벗어나 헌재 결정문에 ‘유효’라는 단어의 존재여부에 대해 쏠렸다. 하지만 헌재 결정문에 ‘유효’라는 단어는 없었다. 나경원 의원을 제외한 다른 패널들 역시도 ‘헌재 결정문에 유효라는 단어는 명시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일관된 주장을 펼치는 나경원 의원에게 그는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고 요청했다.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음 날, 그는 스타가 돼있었다. 인터넷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지인들의 문자가 쌓이고 쌓여 휴대폰이 버티질 못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학생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반항아에서 방송인으로
 ‘학구적 이미지, 사회 이슈에 민감한 학생’ 그의 학창시절에 대해 기자가 생각한 모든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땡땡이’와 친한 사이였다. 항상 선생님께 대들었고 대들고 난 후엔 조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반항의 이면에는 감수성이 숨쉬고 있었다. 매일 밤 라디오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도시>, <음악세계>와 함께 사춘기를 보냈다. 자연스레 그의 마음 한편에 ‘라디오 PD'라는 꿈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입학한 신문방송학과였지만 그의 대학 생활은 평범함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전공공부보다는 음악과, 학과친구들보다는 동아리친구들과 더 가까웠다.

 그러다 잠시 학교를 떠났다. 고향에 내려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심심한 일상에서 그가 선택한 탈출구는 책이었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에 대한 책, 그리고 그 인물이 추천한 책, 과학에 관련된 책, 사회문제를 다룬 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평은 ‘내가 정말 무식하구나’였다. 신문방송학과에 다닌다는 사람이 신문에서 대해서도, 방송에 대해서도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느 날, 마산MBC에 있는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미디어교육을 실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시청자가 직접 제작해 방영하는 시청자제작프로그램 ‘봇물상자’에 참여했다. ‘시청자의 한발 늦은 뉴스’라는 꼭지를 맡아 VJ, 카메라맨 , 그리고 앵커 역할까지 경험했다.

 ‘영상’이라는 매체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현장감을 살릴 수 있는 영상매체만의 특성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꿈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라디오PD에서 영상PD로 변했다. 사춘기 소년의 반항기를 잠재워줬던 음악이 마냥 좋아 선택했던 라디오PD는 어릴 때의 꿈으로 남기기로 했다. 다큐멘터리 영상물이 라디오보다 그의 얘기를 더 많이, 그리고 더 깊게 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론 개혁에 앞선 든든한 대장
 그가 시사교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6년이었다. 2006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북한 핵실험, 호주제 폐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맞붙은 5·31선거. 수많은 사건 중 압권은 황우석 박사 사태였다. 언론은 앞 다퉈 이 사건을 보도했다.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자극적 보도가 범람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생각했다. ‘어떤 언론이 올바른 언론인가.’

 그는 ‘언론공공성을 위한 대학생 연대’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만든 카페가 300명에 가까운 회원을 끌어 모으며 성공을 거뒀다. 그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정기적 토론회와 퍼포먼스를 이용한 비판적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하루는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정병국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중앙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카페 회원들과 함께 아트센터 앞으로 나왔다. 표어는 당시 유행했던 신종플루에서 착안했다. 방문 당일, “미디어 인플루엔자 환영합니다”라는 비판문구가 담긴 현수막을 내걸었다.

 

사회의 벽을 넘어선 그의 열정
 그가 취업을 준비한지도 벌써 1년 6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1년 6개월 동안 그는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갔다. 그의 꿈이 흔들렸다.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을 실감했다. 토익점수가 900대를 찍어도, 수많은 자격증을 따도 그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혹시 그의 취업에 ‘나경원 사건’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일까. 미디어법에 반대한 학생, 한나라당 의원을 망신시킨 학생. 하지만 그는 한국의 언론이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언론인은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믿어요.”

 그는 기자에게 약속했다. “꿈을 잃지 않을 거예요. 언론인의 꿈을 꼭 이뤄서 훗날 선배들에게 물어볼 거예요. 혹시 그때의 일이 취직에 영향을 미쳤냐고요.”
 

송은지 기자 ilnrv@cauon.net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