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욕설과 비난, 경멸을 받을 때 우리는 ‘모욕당했다’고 한다. 이렇듯 모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과 존재에 대한 경멸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의 저자 오창은 평론가는 말한다. ‘체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은 더 심한 모욕’이라고. 이 책의 모욕당한 자들은 이렇듯 체제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강요당한다. 타인을 짓밟아야 생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체제, 생존을 위해 도덕성에 눈감도록 만드는 경쟁사회, 비윤리적인 행동을 합리화하는 사회는 인간의 영혼을 훼손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른바 숙명적 현실이다. 하지만 숙명적 현실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상상력의 부재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쉽사리 상상해내지 못한다. 이미 오랜 시간동안 이 사회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벽을 깨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숙명적 현실은 ‘한시적 현실’이 된다.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지금의 현실은 언젠가 바뀔 수 있다.


인류는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 발전해왔다. 홍역이 죽음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상을 꿈꾸는 의약학자들의 상상력은 홍역을 단순한 감기만도 못한 병으로 만들었다. 만약 그러한 상상력이 없었다면 과학은 정체되고 한시적 현실은 영영 숙명적 현실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불치의 병으로 생각하는 여러 질병도 이상을 꿈꾸는 의약학자들로 말미암아 한시적 현실에 불과하다.


상상력은 비단 과학의 발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한 봉건사회에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인물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정착 될 수 있었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상상한 인물들은 지금의 사회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오창은 평론가는 ‘계몽된 주체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며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상상력을 요구한다. 상상력은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권력이 말하지 않는 것을 직관하며 타자와 공감하게 만든다. 그로써 타자와 공감하는 ‘윤리적 사고’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지식인의 앎과 다르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알아도 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모욕당한 자들에 대해 쉽사리 사유할 수 없다. 우리의 상상력은 타자와 공감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에서는 이 모독당하는 자들과, 모욕당하는 가치에 대해 사유한다. 그의 상상력은 이 땅의 모욕당하는 것들을 상상하고 있다. 그 상상은 또한 허무맹랑하지 않다. 오창은 평론가가 지닌 문학적 소양은 모욕당하는 것들에 대한 상상에 역사성과 사회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의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는 참으로 탄탄한 상상력으로 ‘모욕당하는 자들’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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