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됐는데도 투표가 뭔지 모른다. 한나라당이, 진보신당이 당최 무엇이기에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것인지… 학내에서는 선거 기간이라며 호들갑이다. 권리를 행사하라며 난리다. 시끄럽기만 하고 거슬리기만 한다. 사회 참여니 뭐니 해도 당장의 과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전유상씨는 외친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뎌지지 마세요. 민감해지세요”

    “투표하세요”라는 말에 하나 둘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빨리하는 학생들의 모습. 일상이 돼버린 대학생의 정치적 무관심에 투표소도 선거유세장도 싸늘해진다. 너도나도 정치에 관심 없는 학생들을 보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대중을 향한 비난에 전유상씨(문예창작학과 4)는 반대표를 던졌다. “중앙대 학생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요? 그럴수록 제가 더 뛰어다녀야죠!” 그에게 책임 전가란 없었다. 학생들이 학교의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정치 현장에 나선다.

노동자, 그들의 삶을 말하다

  유년시절, 그가 보는 하늘은 항상 전깃줄을 끼고 있었다. 성북동 달동네 사람들에겐 깨끗한 하늘을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전깃줄로 난도질당한 하늘 아래서 그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직장을 위해 탄광촌으로 유명한 강원도 사북으로 떠났다. 아버지 역시도 혼자 힘으로 그를 키울 여력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큰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그는 ‘가난’을 체험하고 있었지만 ‘가난’을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가난하게 사는 삶이라 어느 하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행과 다름없었던 등굣길도 거뜬했다. 학교에서 꼬박 50분을 등산해야 그의 집이 보였지만 그의 친구들은 다 같은 삶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평지가 보였다. 아버지의 사업 성공으로 강남구 대치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온전한 하늘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제야 자신이 가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경제 수준에 따라 계급이 나눠져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인식했다.

  학창시절, 그의 의식은 혼란스러웠다. 해결되지 않은 혼란의 상태에서 그는 영어교육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한지 갓 지난 어느 날, 방현석 작가의 ‘내일을 여는 집’을 읽었다. 노동자의 삶을 그리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없었다.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그러나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삶. 그의 혼란에 드디어 답이 내려졌다. ‘일한 대가가 부당한 사회 구조’, 이것이 문제였다.

  그 때부터 그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 벗고 나섰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가 열릴 당시였다. 그도 빠질 수 없었다. 촛불 하나를 손에 움켜쥐고 집회 현장으로 나섰다. 집회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동원된 경찰병력에 시민과 학생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한 무리가 있었다. 민주노동당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은 도망의 ‘도’자도 모르는 듯 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게 시간을 마련해줬다. 그 사람들이 보여준 의지에 그는 반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민주노동당은 그의 사고 체계를 흐트려 놓았다. 국민을 위하는 정당이 아닌 계급정당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농사꾼 출신이 국회의원 명단에 당당히 올라와 있었다. 사회적 약자 출신 국회의원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계급 정당이라. 민주노동당이라면 노동자가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열어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안성시위원회 소속 당원이 되었다.

노동자가 되다

  그는 장남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를 학교생활에 충실한 모범생으로 알고 계셨다. 하지만 1학년 성적표가 집에 오던 날, 모든 것이 들통 났다. 성적표와 함께 재판 날짜 통지서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2008년, 촛불집회의 연장선으로 청와대 앞까지 집회를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모든 지원이 끊겼다. 그 역시 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등록금은 대출로, 생활비는 노가다로 벌었다. 막상 대학생 노동자가 되고 보니 노동자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된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에 지원 사격을 나갔다. 그의 눈에 처음 비친 장면은 경찰들의 살인적인 진압이었다. 노동자들은 마지막 방법으로 공장을 점거했다. 생사를 건 파업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공장을 둘러싸고 스티로폼도 녹인다는 산성최루탄을 뿌려대고 있었다.

  ‘임금삭감도 감수하겠으니, 해고만은 철회해 달라.’ 노동자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노동자들의 구호에 맞춰 그도 조직적인 집회를 이어나갔다. 돌아온 것은 용역들의 몽둥이질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역시도 노동자였고 미래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이 70일 동안 이어졌다. 그의 집회도 70일 동안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일정에 맞춰 집회를 진행했다. 노동자 가족들과 함께 여의도에서 3보1배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같이 집회를 다니던 선배에게 변이 일어났다. 평택경찰서 집회에서 선배는 경찰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결국 8개월이라는 징역을 구형받았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먼저 느껴졌다. 물러서기 보다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미래의 노동자를 위해

  인터뷰 내내 울리는 휴대폰.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그는 난감해했다. 예술대 회장이라는 감투를 쓴지도 올해가 2년째다. 그는 예술대 학생들의 불만사항을 하나하나 필기해두고 있었다.

  그가 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회의 현장에 나가 호되게 몽둥이질을 당하고 오는 날이면 항상 고뇌에 빠지곤 했다. 남들처럼 부모님과 오붓한 저녁식사도 하고 싶었다.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싶었다. 노가다가 아닌 정상적인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이 너무 부러웠다.

  수많은 유혹에도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은 두려워서다. 이 사회가 이대로 흘러가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두렵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정의를 믿는다. 정치적 무관심에 시달린다고 하는 대학생들도 부당한 현실에 목소리를 높일 날이 올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그는 그의 청춘을 정치활동에 내맡기고 있었다.


송은지 기자 ilnrv@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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