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단순히 2가지 꿈을 가진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다. 사회의 기준에 좌절하지 않는다. 사회적 인식이 상반되는 의사와 댄서를 꿈꾸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생각이 좌우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꿈꾸고 있다. 의사와 댄서가 동등해지는 세상을. 그리고 분야를 ‘서열로 나뉘어야할 것’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해 주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꿈은 욕심이 아니라 청춘에 대한 예의였다.

청춘에 대한 정의, ‘스스로하기’

  고영두씨(의학부 4)는 의대생 같지 않았다. 그의 말은 항상 “아, 우리같이 몸 쓰는 사람들은”으로 시작했다. 보통 의대생이라면 바느질 솜씨가 좋다거나, 비위가 훌륭할 만큼 강하다고 말했을 텐데. 말할 때마다 리듬을 타는 그의 모습에서 의사보다는 춤꾼의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겼다. 자신을 도구로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예술. 그는 춤을 추는 순간을 ‘쿵쾅쿵쾅’이라는 의성어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했다.

댄서로 이루어 진 어린 날의 꿈
  2008년 10월, 그는 긴장감에 가득 차 있었다. Zippo사에서 주관하는 HOTTOUR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정한 후 2달이 흘렀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그 순간, 2달 동안의 연습 기간이 눈앞을 스쳐갔다. 출전을 결정한 순간의 설렘, 오디션을 통과했을 때 느낀 희열, 그리고 1개월 간 거쳤던 밤샘 연습의 고생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몰려왔다.

  전 세계 200만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한다는 대회. 한국에서는 첫 회부터 전국 40여개 대학에서 60개의 팀이 참가했다. 그는 드디어 꿈의 무대에 발을 올렸다. 환호성이 들렸다. 음악이 흘러 나왔다. 어느새 긴장감은 사라졌다. 무대는 연습한 대로 흘러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즐기고 있었고 관객들의 표정까지 살필 여유가 찾아왔다. 결과 발표의 순간에 그는 다시 긴장했다. “댄스포즈 3등!”이라는 사회자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둥켜안았다. 마음속에 숨어 있었던 입상에 대한 기대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입상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도대체 춤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동요하게 만들까.’그는 춤에 대해 더 알고싶었다. 그리고 그는 춤을 위해 ‘휴학’이라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HOTTOUR대회가 그를 진정한 댄서세계에 입문시킨 것이었다.


  어느 날, 일산의 보습학원에서 공연을 했다. 생각보다 큰 규모였다. 관객들은 4층까지 가득 메웠다.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딴따라 떴다!” 공연 도중에 들린 목소리에 그는 울컥 했다. 그래도 그는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1부가 끝나고 2부 순서가 시작됐다. 춤을 추는 도중 몇몇 관객이 스테이지로 음식물을 던졌다. 굴욕이었다. 댄서들에 대한 이런 푸대접이 억울했다. 공연이 끝난 뒤 학원 원장님을 찾아갔다. 원장님의 멘트는 압권이었다. “아니 뭐, 많이 당해보셨을 텐데 새삼스럽게”

  관객들이 알아보는 재미에 춤을 췄던 시절, 연예인이 된 것 마냥 기뻐했던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이 돼있었다. 부당한 대우에 좌절해 포기한다는 말은 그에게 있을 수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댄서들을 양아치, 공부 못 하는 애들로 취급하는 현실을 바꿔놓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의사와 춤으로 채워지는 그의 청춘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전교 1등은 항상 따 놓은 당상이었다. ‘수업을 열심히 들었어요.’라는 멘트의 주인공일 만큼 모범생이었다. 자가 학습법 덕분에 부모님의 간섭도 없었다. 상위권을 유지하는 성적 덕분에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의사 한 분을 만났다. 그 의사는 무보수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고 있었다. 그 의사는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달랐다. 그가 보던 자원봉사자는 생계가 힘든 사람들 밖에 없었지만 의사는 아무리 무보수로 일해도 지갑이 궁하지 않았다. 그 의사 분을 통해 ‘내 입에 풀칠하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의대에 진학했다. 춤을 꿈꾸던 소년은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대학진학 후,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어른들이 춤을 추는 아이들을 깔보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춤을 ‘불량 학생, 양아치, 공부 못 하는 애들’이 흔히 빠지는 나쁜 길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하류문화의 일부로 찍힌 댄서들에게는 당신들만의 진정성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러한 진정성대신 댄서들의 입시성적과 학벌을 보고 깔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성적과 직업으로 인간성을 평가받는 사회라면 성적과 직업으로 대응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공연이 끝난 후, 섭외해준 업체 사장님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되면 꼭 ‘의대’다닌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고영두씨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의대 다니는 녀석이 춤을 추는 거 보니 춤에 뭔가 대단한 매력이 있나봐.” 업체 사장님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의사가 춤춘다는 사실로 춤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춤을 홍보하기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거리 공연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인식을 바꾸려면 노출이 필요했다. 방송과 언론, 그리고 행사가 자주 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빨리 의사가 되어 생명을 구하는 것과 함께 ‘춤’에 투자하고 싶었다.

도전자가 말하는 ‘역으로 생각하라’
  개척되지 않은 분야를 일구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스트리트 댄스라는 영역도 개척되지 않은 분야와 다름없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분야에 대한 왜곡된 시선, 이를 그는 참치 못했다. 그의 청춘엔 포기란 없었다. 그는 오늘도 나선다. 수업 후에는 동아리방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공연을 나간다.

  의사와 댄서를 꿈꾼다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뻔하다. ‘그래봤자 의사로 먹고 살겠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실이에요. 의사로 먹고 살겠죠.”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고소득이건 사회적 메리트를 가진 직업을 가졌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의사와 댄서, 그에겐 두 가지 다 꿈이었다. 한 가지는 꿈으로, 한 가지는 취미로 만들지 말라고 그는 얘기한다. 자신의 꿈을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송은지 기자 ilnrv@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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