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성들의 공인된 동성애 문화가 있었다. 시민민주주의 제도를 갖춘 그리스였지만, 그 안에 여자와 노예는 고려의 대상으로 들어 있지 않았는데, 노예는 물론이고 여자도 아이를 낳아주는 정도의 소용가치만을 가진 열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남성들의 육체미를 높이 평가했고, 그 한 표현이 동성애였을 것이다. 장년의 남성과 미소년 사이에 이루어진 그리스의 동성애는 지적, 정서적, 성적 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사제관계, 혹은 멘토와 멘티의 관계 비슷한 측면도 있다. 어린 남자는 수동적 역할을 하다, 장년이 되면 능동적 역할로 바뀌는 게 그들의 동성애였다.


헬레니즘의 전통이 그러했던 반면, 서양 문명의 다른 한 축인 헤브라이즘의 전통에서 동성애는 엄격한 금지의 대상이었다. 《구약성서》에는 남성의 동성애에 대해 사형시킬 것을 규정한 언급까지 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문화권에서 동성애는 오래도록 터부였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은 기독교 문화권 바깥에 다양한 동성애 문화가 존재해왔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에 혼란스럽다. 실제로 성의학이나 심리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동성애는 명확한 설명이 닿지 않은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헬레니즘이든 헤브라이즘의 전통이든 남성들의 경우와는 달리 여성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여성 중심의 ‘허스토리’가 아닌, 남성 편향의 ‘히스토리’여서 아예 관심이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노동력의 생산을 중요시한 고대 성문화에서 여성들의 동성애는 종족의 번식과는 상대적으로 무관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지난주에 다룬 영화 《블랙 스완》에서 니나는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계속해서 미숙한 소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순결한 백조는 가능하지만, 유혹하는 ‘흑조’로의 변신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때 니나의 탈출을 가능케 하는 매개자가 릴리다. 새로 발레단에 합류한 릴리와의 경쟁 때문에라도 니나는 엄마의 품을 떠나야 한다. 릴리는 그런 점에서 ‘경쟁자’이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조력자’다. 이처럼 매개자로서의 완벽한 역할을 보여주는 릴리야말로 니나와 함께 이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다. 엄마와 발레단장이 양 극단을 이루고 있다면, 릴리는 그 사이에서 니나의 변신 혹은 ‘각성 awakening’의 동반자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엄마의 ‘금지’를 뚫고 릴리와 외출을 감행한 날 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확인시키듯 나누는 릴리와의 동성애 씬에는 성적 분위기가 없다. 다음날 릴리의 대사가 말해주듯, 실제로 둘 사이에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릴리가 완벽한 매개자, 아니 어쩌면 니나의 환상적 자아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나의 탈출이 보다 확실한 것이 되려면, 그날 밤 외출에서 술과 마약을 거쳐 남자와의 성관계로까지 이어졌어야 한다. 하지만 니나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릴리와 함께 돌아와 ‘엄마의 집’에서 잠자리를 가진 것이다. 이 장면은 엄마로부터의 벗어남이 니나의 ‘어른 되기’, 즉 인간은 ‘백조이자 흑조’이며, ‘천사이자 악마’라는 인식을 얻는 각성의 차원을 갖고 있다.


사실 성적 욕망은 유혹이자 공포다. 여성에게는 임신과 출산, 남성에게는 가족의 부양이라는 부담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 관계란 남성에게는 잠재된 거세공포와, 여성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잃을 두려움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 니나에게 술집에서 만난 남자와의 성은 버거운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릴리와의 동성애는 그런 차원에서 ‘작은 두려움’ 또는 어른의 세계로 가는 징검다리의 첫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실제로 청소년기까지 대부분 동성애의 시기를 지난다. 여성은 특히 더한데, 여성에게 성이란 유혹보다는 공포의 측면이 더 크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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