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무의식을 잃은 현대인에게 보내는 메세지
구스타프 칼 융(1875-1961)을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서울아산병원에서 임상심리 수련생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성격심리학이나 심리치료 과목에서 융을 공부하였지만 그의 개념이 내게는 모호하여 피상적인 수준의 이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융을 공부하자고 펼친 그의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 역시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련을 함께 받던 동기생은 융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융의 신봉자였다. 학문 영역에서 신봉자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잘 알지만 그는 융의 학설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고 자신의 행동을 모두 그 학설에 따라 해석할 뿐 아니라 종교처럼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신봉이 아니겠는가!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 나는 비로소 융을 만날 수 있었다.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심리학 관련 서적 중에서도 특히 융의 분석심리학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꾼 꿈을 두세 개 분석을 곁들여 들려주면서 그의 꿈에서 자신의 무의식이 그에게 심리학을 공부하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학문에 대한 태도가 객관적이지 못한 그를 한편으로 비웃으면서도 ‘도대체 융과 그의 학설은 무슨 매력이 있기에 이 사람이 이러는가?’하는 궁금함을 갖게 되었다.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융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융의 몇몇 저작과 분석심리학을 해석한 여러 서적을 읽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융의 저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분석심리학의 개념은 오리무중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나마 융의 저서 중에서 이론과 개념을 조금 쉽게 기술한 책이 바로 ‘심리학과 종교’였다. 1937년 예일대학에서 강연한 원고를 출간한 이 책은 비교적 자신의 이론을 쉽게 풀어서 기술하고 있지만 이 책 역시 독자가 막상 이를 읽게 되면 만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융이라는 사람이 참으로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임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융은 이 책에서 당대의 사람들이 산업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의식화되어 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의식화는 결국 과거에 그들의 삶을 지탱하여 주던 전통적인 사고와 가치로부터 단절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적 전통과의 단절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종교는 먼 옛날부터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완전하고 가치가 있으며 강력한 실체를 경험하면서 그 실체가 집단무의식 속에 원형의 형태로 형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의 영향을 받아서 신화를 구성하게 되고, 이를 다시 체험할 수 있는 각종 제의를 만든다. 여러 민족의 신화, 전설이나 민화 속의 귀신이나 도깨비, 정령 같은 존재가 바로 이러한 집단무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경험하기 위한 형식으로 그리이스 로마 시대의 각종 제의, 굿이나 기도, 교회의 예배의식, 불교의 재 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무의식에 의해 자율적으로 발현된 것으로서 우리 삶에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사회가 산업화가 되어 가면서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게 되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가 더 커지면서 교회의 제의를 무시하고 제의를 통한 직접적인 체험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적 생활이 강조되면서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적 체험이 무시되었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완전한 통합성을 잃게 되었다. 정신세계의 통합성을 잃은 인간은 결국 불안감과 삶의 무의미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는 각종 신경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주변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융은 ‘심리학과 종교’에서 몇 환자의 꿈을 예로 들고 이를 분석하고 인간의 성격구조와 종교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서 신이 어떻게 상징화되고 인식되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뿐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고 있다.
“만약 내 신앙에 대해 물어보는 자가 있다면......나의 확신하는 바로서, 그것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일 뿐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가설이며, 나는 자신의 지식을 넘어선 무수한 사실을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라고 언급하고 이는 객관적인 과학적 자세를 견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융의 기본 가정은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인간의 동기(권력이나 성욕)에서 생겨난 환상이라고 하여 심리만능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가? 그는 이 책에서 환자의 꿈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성격구조를 설명하고 있고, 전체적이고 완성된 자기를 구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마치 연금술사가 물질 속에서 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같다고 보았다. 융은 연금술이란 실제로는 정신적인 작업으로서 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주장을 한다. 따라서 연금술은 물질 속에 속박되어 있는 신을 해방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종교도 인간의 육체라는 물체 속에 닫힌 신을 의식화하여 그 신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연금술과 같다. 꿈은 종교와 같이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꿈을 분석하는 과정도 우리의 육체 속에 담겨있는 진정한 정신의 완성인 자기를 구현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먼 옛날 우리 인간은 여러 신을 가지고 있었다. 만물 속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만신주의는 각종 자연현상에 대한 숭배와 의식으로 제의화되었다. 그런데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만신주의는 하나 내지는 몇몇의 신으로 정형화되고 상징화된다. 그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불교의 부처와 같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신주의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제의는 기성종교의 일부가 되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왔다. 그런데 현대로 들어오면서 인간은 신이 있던 자리가 텅 빈 만다라처럼 신을 잃고 신을 체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shadow)나 아니마, 아니무스와 같은 것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게 될 때 완전한 자기를 이룩할 수 없게 된다. 신을 체험하는 무의식적 과정을 버림으로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인간의 모습을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무의식 속의 우리 이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의식화하지 못하면서 인간은 신경증적인 상태에서 불안과 갈등을 경험하는 불행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완전하며, 총체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융의 주장처럼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을 겸허하게 들여다보고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융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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