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수난의 역사와 직접 만나는 국난 극복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국립묘
지'로 알고 찾아간 그곳의 명칭은 `국립 현충원'.

헌병 세명만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을 뿐 너무나 한적하여 긴장감마저 느
껴졌다. 더구나 비온 뒤의 쌀쌀함은 `묘지'를 찾았다는 생각과 함께 스산한 분
위기마저 풍겼다. 정문을들어서니 바로 앞에 삼단으로 세워진 충성 분수대가
보였다.상단의 남녀상은 국가를, 중단의 남녀노소상은 애국애족하는 국민을,
하단은 군대를 상징하고 있다는 신도현 관리과장의 설명에서 장엄함이 느껴
졌다.

잔디 깔린 광장을 지나니 현충문과 현충탑을 볼 수 있었다.`현충문의 생김이
낯이 익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중 "이 건물은 순 한국식 건축물로써 고
려말 조선초의 사당전과 극락전을 본떠 건립했다네"라는 관리과장의 설명으
로 왜 이곳이 낯설지 않음을 알게했다.문쪽으로 눈을 돌리니 양쪽끝에 화강암
으로 만든 호랑이가 늠름한 자태로 버티고 있었다. 충신과 효자는 호랑이가 지
켜준다고 했던가.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두마리 호랑이가 지켜주기를
기원하며 현충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30미터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서
있는 현충탑은 묘지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어서, 민족 성지인 국립묘지를 상징
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탑의 앞 계단을 올라서니 좌우에 각각 향로가
놓여 있었고, 그 속에 무명용사의 군번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향로 앞 대리석 벽면에 새겨진 이은상 선생의 현충시가 눈에 띄었다.

왼쪽 돌벽에는 6.25동란, 4.19 학생혁명, 5.16등을 상징하는 조각이 양각되어
당시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발길을 돌려 위패 봉안관으로 불리는 탑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6.25당시 전사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2천여 용사
들을 위패로 봉안하고 있었으며, 납골당에는 시신을 찾았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5천7백여의 유해들을 안치하고 있었다.내부 벽에 새겨진 위패를 보고 있
는데, 빽빽한 이름들 속에 빈 곳이 보였다."조창호 중위가 5년전쯤 월남한 것으
로 밝혀져 이름이 제거되었지"라는 관리과장의 말이었다.

벽 아래에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적은 글과 사진들이 놓여 있어 보는이의 가
슴을 아프게 했다.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천국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었다.
아마도 영령들의 안식과 승천을 기리는 뜻에서였으리라.

밖으로 나오는 동안, 숙연함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국군 묘지에서 국
립묘지로, 작년에 다시 국립 현충원으로 명칭이 바뀐이래 민족수호의 성지로
서 터를 닦아오고 있다네"라며 국립묘지가 앞으로도 많은 애국자들의 성지가
될 것이라고 관리과장은 설명했다.국가 유공자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예
우를 받는 사회풍토가 정착되기를 바라며 문을 나섰다.

<최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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