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인의 고전강독: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왜 고전이 되었을까?

박성우 정치국제학과 교수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기자는 ‘중앙인의 고전 강독 시리즈’로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관한 소개글을 청탁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년 개설하고 있는 나의 근대정치사상이란 과목의 첫 번째 수업 과제다. 과제를 하려면 학생들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헌정사로 시작하는 『군주론』의 첫 페이지부터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과 외세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며 페트라르카의 시구가 인용되고 있는 『군주론』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꼼꼼하게 읽게 되어 있다. 물론 내 바람이다. 정치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마키아벨리라는 정치 사상가를 소개할 수 있는 지면이 할애된 것도 반가운 일이고,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지목해서 글을 청탁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기자의 전화를 받으면서 묻고 싶었다. 왜 『군주론』이 중앙인의 고전으로 지목되었는지 알고 있냐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고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까? 만약 『군주론』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정독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군주론』을 고전으로서 소개해 달라는 것 이상의 보다 구체적이고 ‘복잡한’ 요구를 했을 텐데… 얼굴도 본 적이 없는 학생 기자의 ‘순박함’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군주론』을 소개한 글은 어디에나 널려 있기에, 그리고 ‘중앙인의 고전 강독 시리즈’가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 하기에, 『군주론』에 대한 좀 색다른 글을 쓰기 위한 구실을 대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나,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적 여정은 물론 정치사상사적 맥락에서 평가되는 마키아벨리의 의의 등은 사실 ‘스마트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별다른 수고 없이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따라서 이런 정보로 지면을 채우고 싶지 않다. 또 『군주론』은 이미 ‘알려진 고전’이니까 무작정 중요하다고 교수의 권위를 내세워 강권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권유처럼 고전 읽기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 또 있을까? 대신 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아 있는가를 설명하고, 이 설명을 토대로 우리는 다른 고전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독자들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잔인하고 사악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득을 구하는 태도를 우리는 흔히 ‘마키아벨리적(的)’이라고 일컫는다. 마키아벨리는 전통적으로 존중되어 온  기독교적인 덕(德)뿐 아니라, 신의(信義)나 인자함, 관대함과 같이 오늘날까지 인정받고 있는 모든 종류의 미덕에 반대하는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마키아벨리에 대한 낙인은 물론 『군주론』에 기인한다. 그러나 『군주론』을 한번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는 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소위 ‘마키아벨리적’ 세계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의도한 바가 아닐 수 있다. 편의상, 우리가 만들어 낸 마키아벨리적 이미지를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자.

  『군주론』은 얼마나 마키아벨리즘에 기초해 있을까? 역설적으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군주론』이 정의, 절제, 용기, 지혜와 같은 그리스적 덕성이나, 기독교적 덕성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군주론』에는 분명 군주국의 성공을 위해서 백성에게 관대함보다는 폭력이나 잔인함을 보여야 하고, 백성으로부터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사악함, 기만, 잔인함, 폭력 등이 통치의 수단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늘 변덕스럽고, 시기와 질투에 의해 쉽게 변심한다고 주장한다. 『군주론』에 ‘마키아벨리즘’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마키아벨리즘은 『군주론』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세상을 살다 보면 할 수 있는 얘기다. 또, 이런 ‘마키아벨리즘’을 가장 일찍 대변한 사람을 가려내자면,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마키아벨리즘’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주론』을 읽는다면 무의미한 것이고, 또 ‘마키아벨리즘’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군주론』이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그럼 『군주론』에 마키아벨리즘과 구별되는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무엇인가? 지난 학기에 바로 이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제자가 있다. 나름대로 훌륭하게 의도를 밝혔다. 내가 지도한 학생이지만, 일부의 해석은 동의하지만,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마키아벨리즘과는 구별되는 많은 학자들의 해석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이 지면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군주론』 읽기에 여러 가능성이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선, 『군주론』에 마키아벨리의 음모가 숨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사실 군주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공화주의자라는 것이다. 『군주론』은 군주국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를 알려 주는 군주에게 주는 지침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군주론』의 전술을 그대로 따를 경우 군주국은 외세의 침입에 취약해 지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군주를 속여 프랑스 군대에 의해 메디치 가의 군주국이 망해 공화국이 된 것처럼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마키아벨리가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자라는 입장에 동의하지만, 『군주론』은 군주의 전술의 실패를 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혁명을 유도하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론』이 군주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혹은 후세의 일반 백성들에게 읽히기 위해 저술되었다는 가정에 서 있다. 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소위 ‘마키아벨리즘’으로 일컬어지는 여러 요소들을 『군주론』에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군주의 사악함과 잔인함을 경계하게 하고, 나아가 혁명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은 군주의 ‘마키아벨리즘’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군주론』이 저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군주가 된 자라면, 혹은 자신이 힘으로 군주의 자리를 쟁취한 사람이라면 사실 어느 누구의 조언 없이도 이미 ‘마키아벨리즘’은 터득한 사람일 터이다. 따라서 『군주론』은 오히려 지나친 ‘마키아벨리즘’이 군주국의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군주의 잔혹함을 완화시키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구절은 『군주론』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혹자는 『군주론』에서 이탈리아 애국주의자 마키아벨리를 발견한다. 다수의 도시 국가들로 이뤄져 있고, 이 때문에 외세의 침입에 비교적 취약한 조국 이탈리아를 걱정한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군주가 나타나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군주론』을 가장 ‘마키아벨리즘’에 가깝게 해석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이 밖에도 『군주론』에 관한 매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석사 논문을 쓴 내 제자의 해석을 포함해서 『군주론』 연구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아무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발견한 것으로 끝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마키아벨리를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마키아벨리 연구의 전문가가 아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이 옳은지 확답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 옳은가를 같이 따져 볼 수는 있다. 그런데 같이 따져 볼 수 있는 그룹에 들어오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군주론』을 처음 페이지부터 끝까지 찬찬이 읽어 본 사람이어야 한다. 앞에서 『군주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소개했지만, 구체적으로 『군주론』의 어떤 구절들이 각각의 해석을 지지하는지는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군주론』을 심각하게 읽지 않은 학생들에게 나의 판단은 또 다른 ‘마키아벨리즘’을 만들어 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전으로서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의 확인이 아니라, 면밀하고 꼼꼼한 읽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태도가 『군주론』를 고전으로 대하는 것이고, 『군주론』이 우리에게 고전이 되는 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쓸 때, “하루 종일 입었던 흙먼지가 묻은 옷을 벗고, 궁정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서재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그는 “옛 선조들을 만났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도 고전을 읽은 것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고전 읽기의 결과물이다. 이 글이 우리 중앙인으로 하여금, 『군주론』을 고전으로 대하고, 나아가 마키아벨리가 읽은 고전 읽기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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