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화 교수의 욕망사전-성욕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나는 죽고 싶다는 말과 같다


박철화 교수(공연영상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몇몇 원숭이나 침팬지, 오랑우탄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에게 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프로그램에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동물들의 경우 성이란 발정기가 정해져 있어 한정된 시기에 종족보존(procreation)이라는 단일한 욕구로만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동물들에게 성이란 생존의 한 과정으로서 숨을 쉬는 일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인간의 성에는 종족보존 말고도 쾌락추구(recreation)라는 기능이 하나 더 들어 있다. 종족보존이나 쾌락추구는 모두 창조(creation)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앞의 것은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일이고, 뒤의 것은 욕구불만이나 긴장을 해소하여 생활의 원동력인 에너지를 재충전시키는 것이다. 이 후자에는 사랑의 확인이나 재화의 획득과 같은 기능이 보다 더 세분화되어 들어 있다.

  이러한 성적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생물주의(biologism) 혹은 생물학적 환원주의(biological reductionism)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성적 행동과 역할, 성적 상호작용 등이 유전적으로 결정된 선천적인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이에 반해서는 구성주의(constructionism)적 입장이 있다. 성과 관련된 것들 역시 사회, 문화, 학습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선천적 본성이 아닌 후천적 요인에 따라 구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둘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사회생물학(sociobiology) 이론도 있다. 다윈의 진화론 및 인구 유전학에 따라 동물과 인간의 사회행동을 설명하려는 견해로서 성을 포함한 모든 행동이 진화를 이끄는 유전자의 작용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의 성적 욕구란 개체의 종족번식능력의 주된 요인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성욕을 인간의 모든 행동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근원적인 에너지로 보는 입장이 있다. 자연적이든 문화적이든 모든 인간적 현상이 성적인 충동 또는 성적 에너지에 의해 기반을 두고 있다는 범성주의(pansexualism)가 그것인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프로이트 이론이 범성주의로만 요약되지는 않으며, 여전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욕망과 관련해서 프로이트 이론의 과학화를 내세운 라캉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완벽하게 충족되기를 바라지만(상상계), 그 욕망은 현실원칙에 의해 금지되고(상징계), 그에 따라 채워지지 않는 여분이 남는다(실재계). 그 어긋남이야말로 욕망이 계속 남아 있는 이유인데, 그 채워지지 않은 찌꺼기 때문에 다시 되풀이 되는 반복충동이야말로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이룬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無)’에서 태어나 심장의 고동으로 시작되는 삶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대상과 목표를 갈구하며 다시 ‘무’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생명으로서 대상과 목표를 갈구하는 에로스는 사랑을 통해 대상과 완벽한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다. 하지만 그 완벽한 일치란 사실 더 이상 욕망이 남아 있지 않은 죽음을 의미한다. 생의 본능으로서의 에로스와, 그것의 극적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라는 타나토스는 이렇듯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부르며 또 밀어낸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것이며, 결국 나는 죽고 싶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지만 사실 폭력에 가까운 맹목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며, 마치 시지프스처럼 서로를 부르며 죽음이 찾아오기까지 하나가 되고자 애쓰는 것일 뿐. 죽음을 거부하는 이 자세야말로 지혜의 욕망일 것이다. 그런데 맹목은 뜨겁고 지혜는 차가워, 사랑과 성은 늘 뜨거운 쪽으로 기운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 가진 불완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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