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자생성과 방법론에 관한 이 논쟁은 원래 대학원신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년 11월 27일 대학원에서 주최한 ‘한국사회의 근대와 탈근대’ 심포지엄에 발표된 김영민 교수(한일신학대 철학과)의 글 ‘근대성. 자생성. 학문성-소묘’에 대해 최영진 박사가 의견을 기고하면서 촉발되었다. 그후 대학원신문 지면을 통해 각자 두 차례씩 의견을 주고 받았다. (대학원신문 119~122호) 중대신문에서는 본 논쟁에 학내 관심을 확산시키고 보다 긴박한 논쟁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대학원신문과 합의하여 총 3회에 걸쳐 게재하였으며, 이러한 논쟁이 학문간의 패쇄성을 극복하는 학문대화의 장이 되었기를 희망하며 논쟁을 끝마친다. <편집자주>

이른바 ‘보행의 철학’은 내 책 진리·일리·무리1998’의 문제들을 ‘몸의 인문학’이라는 생각의 덩어리와 접맥시킨 것인데, 근자의 내 주된 관심거리 중의 하나이며, 물론 우리 학문의 자생성을 위한 하나의 시론입니다. 나로서는 생각의 전기(轉機)를 욕심낼만한 테마이지만, 아직은 성취가 부실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 공과에 대한 평가는 쟁점도 아니거니와 여기서 마무리될 일도 아닙니다.

‘자생성’이나 ‘보행의 철학’이 관념론적 추상어라고 비판했는데, 나는 이것을 학제성(學際性)이 조율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이라고 보고 싶어요. 나는 그간 실명 가능성의 원리에 근거한 과학적 낙관주의와 각종의 신비주의, 학문무용론 사이에서 내 나름으로 우리 인문학의 ‘애매성’이 개현시킬 고유한 학문성의 지평을 확인하는 것이였지요. 아무튼 둘 사이의 입장 차이도 있겠지만, 우선 나눔과 사귐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최박사는 학문의 자생성이 “자아준거적 문제의식과 실사구시적 탐구방법”에 있다고 요약합니다. 이것은 서구 담론의 보편성을 맹신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대체로 수긍할만한 태도이며, 기실 이 표현에만 국한시키면 최박사와 나 사이에 아무런 마찰이 없습니다.

나는 자아준거적 문제의식이라는 취지에 십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이 표현, 진단, 설명, 유통, 토론되는 과정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주체적인 접근과 성찰이 없다면 필경 이른바 ‘담론의 내부식민지’가 생길 것이고, 따라서 학문의 자생성을 위한 전략으로서는 매우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했지요. 최박사가 “문제해결과 진단 차원에서 외국의 이론을 빌어다 쓰는 것은 크게 문제삼을 것이 없다”고 한 것에 주목한 것이였습니다. 우리와 구미 사이의 진적 교류가 하다못해 1:1이라도 된다면 어차피 구미의 문화와 학문이 세계를 지배한 터에 최박사의 원칙론에 제동을 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리의 것’이 대체 무엇인가? 라는, 그 진부하고 무능한 역습을 반복하지 않겠지요. 프랑스제 담론이니 미국의 실용주의니, 오늘날 국적을 띠고 돌아 다니는 무국적 담론이 어디 하나 둘입니까?- 현대 자생담론은 실질적으로 전무한 상태이며, 따라서 우리는 내내 우리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외국의 이론을 끊임없이 사용해왔으니, 최박사의 말은 단순히 현실을 인정하자는 동어반복이던가요? 우리의 문제를 적실하게 진단하고 해결해주는 외국의 이론을 선용하자는 주장이 학문의 개방성과 보편성을 촉진하는 미덕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문시장의 지형과 역학이 최소한의 주체성과 자생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조금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생각의 보편성과 교류의 개방성을 주장하는 노예란 필시 자기모멸 아닐까요? 내가 학문적 인프라의 구축에 대한 전략적 연대없이 문제풀이 중심으로 외국담론을 소비하겠다는 태도는 실질적으로 학문적 타율성과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도 같은 배경이지요. 더구나 인문학에 이르면, 진단의 적실성이나 문제 해결의 여부에 못지 않게 해결의 주체와 과정, 그 의미와 가치가 보다 중요한 쟁점이 됩니다.

최박사는 ‘실사구시의 태도’를 강조하면서, 이를 ‘진정한 상품성’과 연결시켜 “해당 사회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여 해당 사회가 제기하는 문제를 해명하고 실천적 방안을 내놓을 수 있는 이론”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국학계를 제외하고 담론계의 거의 전부를 수입담론이 싹쓸이하고 있는 마당에서, 그리고 그러한 이식(移植)의 망 속에서 문자적 계몽에 매몰되어 살아온 우리 학인들 사이에서, ‘우리의 필요와 요구’가 과연 얼마나 ‘우리의 것’인지를 보다 심각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아준거적 문제의식이나 실사구시의 태도를 표명하기 전에, 그 ‘의식’과 그 ‘태도’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거나 왜곡당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섬세한 관찰과 반성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개인의 절실한 필요가 구조의 망에 걸려 파닥거리는 새 한 마리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듯이, 개인의 학문적 양심과 결기도 체제와 구조와 허위의식의 한 매듭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간단히 나는 우리의 차이가 원칙과 현실 사이의 조율이 빚는 긴장이라고 봅니다. 결국 나는 최박사의 학문원칙이 통할 수 있는 학문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고, 최박사는 언젠가 나같은 선배의 고민과 성취를 밟고 그 원칙을 보다 조금 더 힘있게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용하 씨의 글은 지면상 답변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는 침묵을 권유했으니 이렇게 기고한 것 자체가 나름의 답변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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