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일본 다도(茶道)의 유래와 역사

 

 

 

일본 역사에서, 다도(茶道) 문화는 거의 5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 또는 차를 대접하는 관습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그것을 일본처럼 하나의 다도‘문화’ 라고 일컫지는 않는다. 하나의 문화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삶의 가치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수용하고 계승해 오게끔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종교’의 역할이다. 그것은 다도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는데 오카쿠라 텐신의 『차의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불교의 선종에서 비롯된 의식이 15세기 일본의 챠노유우로 발전했다고도 나와 있다. “스님들은 보리달마상 앞에 모여서 거룩한 성찬에서처럼 지극한 공경으로 한 사발의 차를 마셨”다는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이미 불교의 기원이 일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차는 처음부터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는 원래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확실하게 언제쯤 일본에 전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8세기 나라시대에 견당사로 간 승려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중에서도 확실한 사실은 쇼무(聖武)천황시대(729)에 행다(行茶)라는 의식이 치러졌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의 선종 행사 의식과는 다른 것으로, 천황이 봄과 가을 두 차례 백명의 승려를 불러 모아 대반야경을 독송시킬 때 두 번째 행하던 의식이다. 인차(引茶), 또는 행다의식이라 이름하여 승려와 같이 차를 마시던 행사를 말한다.

그러다가 차나무가 일본에 처음 심어진 건 9~12세기인 헤이안시대이다. 당에 건너가 30년 가까이 공부한 에이추 선사가 차씨를 가져와 사카모토라는 곳에 심게 된 것을 시작으로, 13~14세기 말기 가마쿠라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무사 계급과 상류계급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 15세기 중반 무로마치 시대를 전후로 일반인들 사이에서 성행하기 시작해 나중엔 점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중요한 건 차를 마시는 행위가 점점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일정한 의식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실이라는 장소와 다실 밖으로 보이는 풍경, 그리고 차를 마시기까지의 일정한 절차를 정한 것을 봤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차는 마시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일본 역사에서 알아두어야 될 건 다도의 기원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끽다 풍습이 일본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주의깊게 봐야 할 것은, 일본의 다도문화는 몇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끽다(喫茶) 풍습을 어떻게 그들만의 문화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 관습으로만 남아있지 특정한 문화로 이어져 내려오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려면 ‘차 한 잔에도 진리가 있다’ 라고 믿는 그들의 이상과 철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Ⅱ. 다도와 일본 문화와의 연관성

 

 

 

역사의 흐름에서 다도의 유래를 놓고 봤을 때, 차(茶)를 마시는 관습은 일본이 처음은 아니다. 또한, ‘차(茶)’의 원산지가 중국이었다는 것을 봤을 때, 차 자체가 원래부터 그들과 함께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흥미롭게도, 중국에서부터 처음 전래되어 그것이 문화로 정착된 것이 그 시초가 되고 있다. 또 그것이 단순히 ‘정착’된 것만이 아니라,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로 ‘변형’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물론, 차 마시는 행위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상생활에서 관습화되어 있긴 하다. 심지어 ‘차(Tea)’라는 말이 온 세계에 통용될 정도로 차는 인간 생활에 일부가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의 차의 의미는 유독 차별성을 두고 있다. 특히 차를 마시는 순서가 일정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에서 보편적인 관습이 아닌, 특수한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다도(茶道)’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봤을 때, 차(茶)는 살아가는 길(道), 즉 정신세계를 고양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을 뜻한다. 불교의 선(善)사상에 바탕을 둔 것도 그 이유이지만 중요한 건, 그 실천의 방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도가 어떤 종교의 교리만을 서술하고 있지 않는다. 그것은 음차(飮茶), 즉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또는 그 과정 ―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행위, 사람과 사람이 마주앉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일상적인 행동들 ― 에서 그 형식이나 기본자세를 구체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다도가 지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동시에 ‘문화’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커다란 이유로는 음차라는 기본적인 단계를 초월한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를 특정한 장소에서 마실 수 있는 다실이란 공간과 정원,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조건 하에 주인과 손님은 차를 대접하고 음미한다. 또한 사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경계를 확실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을 통해 다도는 형식에 불과한 관념적인 유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형상화’다. 예를 들면 다실에 들어서기 전 손을 씻고 입을 행구는 장소인 츠쿠바이(돌로 만든 물그릇)를 살펴보자. 만약 단순히 위생적인 관점으로만 보았다면 이런 형식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의미는 한 국자의 물로 몸과 마음을 함께 맑고 깨끗하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형식적이거나 관념적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가치가 부여되게끔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또는 행위)은 이전의 자신이 또 다른 자신으로 변화된 것을 의식하기 위한 하나의 절차로 작용이 된다.

 

 

 

한 잔의 차를 타는데 필요한 순서가 하나의 기술처럼 이어지기도 하고, 매우 복잡한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려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 형식 가운데 다도문화를 푸는 열쇠가 존재한다./ 관념적 유희성이라는 말을 비속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도는 절차나 형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이상에 다가가려는 하나의 유희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다도는 하나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안과 밖을 격리하기 위해서 문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문이라는 건조물을 만들고, 그 옆에 토담이나 싸리 울타리 혹은 돌담이라도 쌓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도의 경우는 그러한 물질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인가를 그 자리에 두는 것만으로 안과 밖을 구별하고, 안과 밖의 정신적인 차원의 차이를 관념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쓰쿠바이에서 물을 떠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경우도 같은 것이다. 그 행위를 계기로 하여 그 이전의 자신이 또 다른 자신으로 변화된 것을 의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절차이다. 로지라는 지평적인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고, 세속과 탈속이라고 하는 시간적인 질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일상다반사로서 차를 마시지만, 일단 다도가 되면 그것을 불도수행과 통하는 관념의 세계가 된다. 간소하고 좁다고 해도 와비의 정취가 있는 다실을 어떠한 황금궁궐보다 존엄한 불도수행 도장이 된다는 인식, 그런 사고가 있기 때문에 다도가 문화로서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이도록 하는 것, 그것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일정한 행위와 다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법칙을 통해 상징하는 것들을 ‘보이도록’ 사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 보고 싶으면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차”는 단지 감상하는 것과는 달리 가능하다면 행위로 보는 것이며 때문에 “다도는 그릇으로 보는 도이고 더불어 또한 사용하는 도”라고 하는 것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세속을 벗어난 탈속이라는 세계라는 질적 전환을 정신적으로 실현하도록 하는 준비행위인 것이다. 더 나아가 행위의 궁극적인 이상은 타계적인 자유의 세계를 실현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한 잔의 차를 마신다는 행위 가운데, 자유롭게 비상하려는 이상이 항상 우선시된 이른바 극단적인 정신주의, 강렬한 이상주의를 기초로 한다. 그래서 다도가 즉물적인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것들, 간소한 다실, 정원에 떨어진 나뭇잎 몇 장과 같은 풍류적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큰 의미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한 잔의 차에도 진리를 알 수 있다거나,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발견한다는 깨달음의 이치처럼 이것은 더 나아가 일본인의 고유한 심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타계적 관념의 소산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도(道)가 말하는 공통된 진리처럼 원래 ‘있는’ 것인데 발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의식 속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곳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 문화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독특한 체계를 지닌 다도문화를 봤을 때, 그들에게는 특별하게 차별을 두고 싶어하는 기분이 문화로서 정착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문법, 미학으로 되어 있는데 종이 한 장이나 격자 하나로, 소위 목책을 만들어 심리적 차별성을 나타내는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무턱대로 염불을 외우는 것만이 전과 같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도(道)와 같이 어디서나 통용되지만 보이지 않는 진리를 구체적인 행위로 확립하는 “차별성”을 둔다. 그리고 그것이 적절하게 조합될 때 소위 말하는, 일본만의 문화적 특수성과 일본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보편성을 얻는다. 그래서 텐신이 다도가 무조건 ‘도(道)’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도 말고도 복합적인 사상과 의미가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다도가 일본만의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차가 단순한 음료로 취급되지 않듯이 일상에서 행해지는 다반사가 아닌, “의례를 통해 마실 수 있는 것”으로 특수하게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Ⅲ. 다도(茶道)의 미의식과 문화

1. 관념적 유희에서 비롯된 특별화하기

 

 

 

일본의 차 문화가 활발하게 번성한 시기는 헤이안시대 말기에서부터이다. 그 중에서도 단절된 송나라와의 문화적 교류를 계승했던 인물 중 하나로 에이사이 선사가 있다. 그는 중국에서 당시 유행하던 선불교를 도입, 음다 풍습도 일본에 널리 퍼지게 했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차에 대한 여러 가지의 생각과 경험, 철학이 담긴『끽다양생기』가 집필되었는데 여기서는 지금의 예술로서 혹은 생활의 미학으로서 이해되는 다도에 대한 내용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가 집필한 책을 받은 장군 사네토모가 차를 건강을 위한 묘약으로 인정한 것처럼, 생리학적인 효용을 중심으로 쓰여졌지, 타계 관념적인 세계를 향한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의 뜻은, 초기 일본에서의 차의 의미는 종교 제례와 더불어 생리학적 효능, 약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치로 왜곡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 초기 무가계급인 상류층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일종의 향락으로 변질되었을 때다. 비록 그 의도는 왜곡되었을지 몰라도 바로 이 때가 가장 많은 차를 애용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지금의 다법을 추구하는 다례가 성행할 수 있게 된 동기 또한 유흥에서 비롯된다. 15세기 무로마치 시대 중 요시마다 정권을 잡았던 시기를 살펴보면, 자신의 취미생활을 하던 중 모든 놀이를 답습해서 지루하던 차에 ‘뭐 좀 특이한 것이 없는가’로 시작된 것이 지금의 다도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다도는 유희의 일종이다. 그 중에서도 앞에서 말한 “관념적 유희”이다. 그 유희는 헤이안시대의 상류 계급에 의해 잘 나타난다. 그들이 생각했던 다도 풍습은 가문의 품격과 교양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없고 지위와 신분이 보장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시기 잠깐 향략으로 변질되었다 하더라도) 형식적이며 관념적인 세계를 추구할 수 있었다. 즉, 차는 엘리트들의 향유물이었다. 그러다 그것이 원래의 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때가 무로마치시대 중기서부터이다. 이때서부터 종교적인 심미의 세계를 포함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차의 이상을 향상시킨다. 그래서 유희로 시작된 다도는 하나의 특별한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다도는 예술의 특성도 포함하고 있다. 일정한 다례의 절차가 형식적 의식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예술 또한 보이지 않는 감정의 형태를 다루는 일이다. 다시 말해 예술도 일정한 의식으로서 사람의 반응을 조작하고 감정의 형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의 형태를 다루기 위해 꼭 필요가 요소가 즐거움에 기반한 유희인 것이다. 유희처럼 예술과 다도 또한 특별한 어떤 것으로 인해 삶을 보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또한 다도가 불교에서 비롯된 제의와 관련되어 있다고 봤을 때, 그것은 더욱 확실하게 증명된다. 유희가 진기함과 의외성을 추구한다는 것, 또 다도의 순서와 같이 “특별한 시간, 특별한 옷, 특별한 분위기가 적용되는” 것과 같이 다도 또한 “특별화하기(making special”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들은 차를 마시는 것보다 차를 마시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배경을 이루는 제의와도 관련되어 일상적인 것을 과장되거나 형식화된, 즉 의도적인 비(非)일상성으로 만듦으로서, 개인에 감정에 영향을 미칠 의도로 구성한다. 따라서 제의와 예술은 둘 다 형식화되어 있다. 다도에서의 제의와 예술의 관계 또한 살펴본다면, 유형화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를 일정한 분위기 속에 결합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공통의 감정 속에서 인간은 ‘공동체 의식’ 혹은 ‘몰입’과도 같이 자아의 초월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제의와 예술은 실생활로부터 별도로 차단되어 있거나, 특별한 법칙을 통해 일부러 차단시킨다. 그 차단의 방법으로는 다도의 순서처럼 특별한 질서, 영역, 분위기, 유지되고 있는 상태나 기존의 일상이 아닌 비일상적인 것들로의 변형이 있다. 이러한 변형은 우리에게 창조성을 부여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통한 혁신적인 행동들을 더 많이 발생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은 어떤 것들을 특별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행위이며, 그 행위는 예술 활동을 자극하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작용된다.

그 중에서 텐신은 이것을 “일상생활의 미에 대한 숭배”라는 점으로 생활 속의 미학을 종교가 결정한 미적 감각으로 형상화했다. 그 말의 뜻은, 삶에 관한 일상생활의 세속사 중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을 숭배하는 것에 기초한 일종의 의식이다. 또한 그것을 심미적 종교의 차원으로까지 격상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특정한 ‘행동’으로 유형화된다. 그것은 다회에 초대받은 손님이 로지로 들어가는 과정이라든지, 들어가서 꽂혀 있는 꽃에 경의를 표한다거나 이 모든 행위 또한 엄숙하게 진행되어야 된다는 것들을 본다면 말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감정을 동반한 사회적인 목적, 다시 말해 그들만의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게 된다. 그 공동체 의식이 일본 고유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다도의 이념적 유희는 행위의 형식적 의의, 즉 ‘형식의 미’로도 말할 수 있다.

 

 

 

‘차’는 항상 예에 이어진다. ‘차’가 법에 섞이면 저절로 다례가 된다. 예는 법이고 형식이고 형태이다. 차를 달이는 일을 법에 맞도록 하는 것은 차를 달이는 행동이 좁혀져 모든 쓸데없는 것이 줄어들고 없어서는 안 될 것만이 남는 것이다. 그것이 結晶되면 저절로 형태를 낳는다. 여기에서 다례가 생겨난다. 다례(茶禮)는 동작의 형식화라고도 할 수 있다. 형식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워서 우리들은 그것을 종종 ‘모양화’ 라고 부른다. ‘차’의 형태는 동작의 모양화이다. 모양이라는 것은 사물의 모양을 축소한 형태이고 말하자면 단순화, 요소화(要素化)된 것이다. 그 요소적인 것이 강조되어서 표현되면 저절로 모양에 이른다. ‘차’의 동작이 원소적인 것으로 환원되면 ‘차’의 형태를 떠난 다례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 형태가 몇 명 다도의 선조에 의해서 나누어져 몇 개의 유파를 형성했다.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것에서부터 동작의 모양화를 이루어낸다는 건 그만큼 ‘상징’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다례(茶禮) 자체의 의미처럼 “예는 의식이고 규범이”며 “예에 이르러 차도 깊은 경지에 이”르고 이러한 예식으로 고조되어야 비로소 다도가 있다. 그래서 그 방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요구되고 그래서 다례는 그만큼 권위가 있다. 이것은 예술의 한 특성인 “다양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주의를 일깨우고, 사로잡고, 유지”하는 것과 일치한다. 이것을 통해 봤을 때 일본의 문화는 ‘인공 속의 자연’처럼 사상이나 감정을 압축한 일상적 예술을 지향한다. 그 지향으로는 일상의 하찮은 것일수록, 예를 들면 뜰의 풀을 뽑거나 정원의 마당을 청소하며 차를 마시는 동안에 오고가는 문답들 속에서 얻어지는 참된 선(善)을 수행하는 행위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실직적인 행위를 유발하도록 하는 사상은 불교(그 중에서도 도교인) 의 선(善)의식에서 유래하고 있다. 일상의 특별함을 부여하게 되는 근원은 모든 것들의 교리가 되는 종교이다. 또한 그 종교가 일상생활과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닌 그 속에서 일상의 행위를 특별하게 느낄 수 있도록 실천하는, 이른바 ‘실천적 철학’으로서의 문화를 중요시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2. 미학적 이상

다도의 유래가 종교의 제례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본다면,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종교적인 경건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다도가 문화로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상을 초월한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도에도 오랜 수련과정이 있듯이, 그래서 다인이라 일컫는 사람을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적이지 않는 자, 즉 성인(聖人)이라 칭한다. 그래서 ‘그 무엇’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될, 또는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다도를 행하는 사람의 유일한 목적은, 일상생활의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진 하나의 이상세계로 들어가는 의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이상적인 정신으로 고양된다고 믿는다. 동시에, 돈이나 권력에서 해방될 수 있는 탈속 또는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마치 “흐름에 따라서 만물의 본체를 파악하면 기쁨도 없고 걱정도 없다”라는 말처럼 다도의 경지 또한 이 정취를 추구한다. 또 “다도는 ‘聖’이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바뀌었을 뿐” 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다도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미는 해탈이다. 즉, 세상의 이치에 관해 모든 깨달음을 얻어 평정심에 도달한 자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차는 약용으로 시작하여 음료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8세기에 고상한 놀이의 하나가 되어 시(詩)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15세기 일본에서는 그것에 기품을 부여하면서 심미주의라는 종교, 즉 다도茶道로 드높였다. 다도란 하찮은 일상 가운데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앙(崇仰), 그것에 기초한 일종의 의례다. 다도는 순수함과 어울림, 보시(布施)의 신비, 사회 질서의 낭만성 등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에 대한 숭배다. 말하자면 불가능의 연속인 이 인생에서 무언가 가능한 것을 성취하려는 은근한 시도다.

 

 

 

텐신의 말처럼 다도는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하찮은 일상 가운데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앙, 순수함과 어울림, 보시의 신비, 사회 질서의 낭만성에 대한 것들이다. 고상한 놀이에서 시의 영역으로 들어간 중국의 음다와 비교하며 텐신은 중국과는 차별을 둔 일본의 차 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일본의 차 문화란, 그것에 기품을 부여하면서 심미주의라는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 일본의 다도라고 하고 있다. 그들만의 섬세한 내적 성찰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 그 성찰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에 대한 숭배다. 즉 가능한 것을 성취하려는 과정이며 ‘인식(認識)’하고자 하는 ‘존재(存在)’를 포함한 ‘가치(價値)’와 그 가치를 누리는 즐거움이다. 이러한 느낌이 체험되면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표준들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로써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걱정이 없고 항상 즐거울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다도 문화가 단지 우리가 이야기하는 의식이나 의례인 도교나 불교와 같이 종교적인 단계까지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유희에서 관념적 이상의 구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일상다반사에 형이상학적인 의식과 도덕적 경건함이 동반된 미적 가치, 또는 미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또, 도덕적 경건함으로서의 관점에서 센노 리큐는 다도의 정신을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고 했는데, 화경(和敬)은 유교에서의 조화, 사람과 사람사이의 윤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청(淸)과 적(寂)은 개개인의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청(淸)은 다도에 있어서 가장 일본적인 요소인데 그것은 다실을 청소한다든지, 향을 피우고, 츠쿠바이를 배치한다든지 하는, 각 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청정(淸淨)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실에 들어오기 전에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 청결하는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적(寂)은 불교용어로 ‘적멸(寂滅)’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뜻은 맹목적인 격정을 버리고, 참된 자기를 향하여 눈을 뜬다는 것이다. 보통 쓸쓸함이나 덧없음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집착을 떠난 신심(身心)의 해탈 상태를 말한다.

그 의미에 대한 본질은 일종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깨닫는 데서 얻어지는 고유한 가치이다. 또한 깨달음의 결과보다 깨달아가는 과정 자체를 참된 아름다움이라고 텐신은 여기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다도가 추구하는 미와 약간 다른 양상을 띤다. 텐신이 말하는 “道가 길이라기보다는 통로”라고 하는 것처럼, 그는 “완전 자체보다는 완전을 추구하는 과정에 더욱 중점”을 두고 “참된 아름다움은 마음을 통해 불완전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람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것을 다도의 진정한 아름다움, 정적과 화합이라는 심미적 가치와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시간이 되면 손님들은 마치아이(まち-あい:다실에 들어가기 전에 기다리는 곳)에 들어온 차례대로 로지를 걷기 시작한다. 손님들이래야 와비차의 경우 2~3명, 많아야 3~4명이다. 마음의 평화와 타인을 존경하며 그들과 화합을 이룩하기 위해(和敬의 윤리)차 모임에 참석하므로, 더욱이 일생에 단 한 차례 만난다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이치고 이치에いち-ごいちえ)의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찾아오므로 손님들 사이에 다툼은 있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행위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자유로움이다. 그렇다고 ‘자유’라는 것이, 형식조차도 무시해버리는 제멋대로라는 뜻이 아니다. 깨달음을 통해 평정심을 얻을 수 있는 일, 또 평정심과 함께 세상과 조화를 갖는 일이 모든 이치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 자유 속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높은 지위나 권위를 소유함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탈속(脫俗)의 느낌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도가에서 찬미하는 인격의 ‘멋’ 과 연결된다.그리고 거기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인식과 존재가 일치하게 되는 미감(美感)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 미감은 위에서 말한 인식과 가치, 존재가 합쳐진, 이른바 도교에서 말하는 ‘총체적 미감’ 으로서 이것이 제대로 발휘될수록 삶의 질이 높은 것이고, 낮을수록 자신의 삶 또한 낮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행위는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탈속(脫俗)한 자유로움에서 볼 수 있는 무아(無我)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라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과의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성인(聖人)이며 성인은 그 속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텐신이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속함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은 어떠한 번민도 없는 미학적 이상의 단계까지 끌어올리며 거기에서 비로소 자신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바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Ⅳ. 일본적인 것, 그리고 습합(習合)의 문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적인 것’은 없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 무색할 정도로 일본 고유의 다도 문화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 ‘고유’라고 말할 수 있는 색채는 없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는 일본문화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형태로 문화는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형성되는 과정은 다도문화가 만들어지는 것과 유사한 원리에서 이루어진다. 즉,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대상에 일정한 법칙을 부여한 "특별화하기"(making special)로 인해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는 것처럼 동서양의 모든 문화도 그와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일본만이 남들과는 다른 특수한 문화체계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기존에 있던 것, 또는 익히 알고 있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빌려다가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것을 가미하여 결국 전혀 다른 대상을 탄생하게 하는 습합(習合)사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모든 문화 안에는 이러한 습합 사상이 들어가 있다. 그들의 문화를 주의 깊게 살펴 봐야할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들은 남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재능을 가지고 기존의 문화에 새로운 것을 섞어 이제까지 보지 못한, 특수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문화를 만들었다. 다도 문화를 예로 들어본다면 몇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음다 풍습보다 일본의 다도는 그보다 불과 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중국의 풍습을 빌려 오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특수한 문화체계로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중국의 음다 풍습보다 일본의 다도이다. 그 안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면 차를 끓여가는 과정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진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것은 미학적 이상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구현은 정신을 초월한 그 무엇에 도달하려는 인간 본연의 욕구이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 또 특수한 문화로서의 다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까지는 일본인들 각자의 노력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그들만 향유하고 마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 오카쿠라 텐신의 『차의 책(The book of Tea)』처럼 아예 다도라는 문화를 영어로 쓴 책으로 집필하기까지 하는 ― 세상에 내놓아 일본이라는 나라를 좀 더 올바르게 알아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일본적인 것들에 대한 재확립을 도모하며 서양과 동양 양쪽에 대해 일본의 사상과 문화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일본만의 것”을 강조해서 그런지 몰라도 우월문화에 입각한 국수주의로 치우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한 지나친 상징이나 형식만을 지향하는, 다시 말해 인간적인 열정보다 감상적인 높은 가치에만 몰두하는 속물주의(Snobbism)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물론, 그들의 문화에서 이러한 점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고정관념과도 같은 ‘~(일본)적인 것’ 이라는 것들을 아무런 비판 없이, 원래 그들 고유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편견이나 단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 고유의 것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특별화하고 동시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게끔 한 그 원동력을 봐야 되는 것이다. 그 원동력 중 하나는 표현의 중요성이다. 풍습으로만, 사상으로만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일종의 행위로써 보이게끔 표현해내는 것. 그것을 습합의 방법으로 먼저 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특수한 문화가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립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가치로부터 나온다. 그게 바로 문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리고 그 문명이란 널리 행해지는 것에 있다는 것, 즉 개인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의식적으로 실현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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