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만 고민했는가? 이제 ‘사회적인 것’이 대세다. ‘사회적인 것’은 뒤르켐에 의해 처음 제시됐고 많은 사상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사회적인 것’을 위기에 직면케 했다. 하지만 최근 사회의 보호와 재구축 운동이 속속 관찰되고 있다. 이 역시 자본에 의한 포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태라는 점은 ‘사회적인 것’의 부활을 어렵게 한다. 2010년 현재 ‘사회적인 것’의 위치와 가능성을 알아본다.

 1부 사회적인 것의 개념과 필요성
      - 왜 ‘사회적인 것’인가?
 2부 사회적인 것의 위기와 종언
      - 포스트모던 징후, 그리고 사회적인 것의 위기
      -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적인 것의 파괴
 3부 사회적인 것의 재구축과 자본의 포섭, 돌파구는 없는가?
      -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 자본론
      - 위기관리 전략, 사회책임투자
      - 사회적 소통의 퇴행과 대안, SNS
      - 착하지 않은 유통과 거래, 착한소비
 4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 사회적인 것의 가능성과 정치를 위한 조건들

 

세계와 접속하는 다른 방법, 공정무역
기업인들이나 경제나 경영 분야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무역 분야에 ‘공정’이란 수식어를 단 착한 흐름이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공정무역이 바로 그것이다. 공정무역이 전체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까지 세계 총 무역거래량의 0.01%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지만, 해마다 40~50%이상의 높은 신장세로 그 규모와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다.

공정무역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현재의 관행 자유무역에 대한 비판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리카아도의 ‘비교우위설’에 입각하자면, 누구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자유무역이 그 약속과는 달리 개발도상국의 생산자들과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정무역은 지금까지 소외되어온 개발도상국의 생산자와 노동자들의 생산물을 공정한 가격으로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자립의 기회를 보장하며 기존의 자유무역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이 운동이 80년대까지 공정무역(Fair Trade)보다는 주로 대안무역(alternative trade)으로 불리었고, 최근에도 공정무역 ‘운동’을 추구하는 단체들은 스스로 대안무역단체(ATOs, Alternative Trade Organizations)로 호명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차별성과 대안성은 공정무역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공정무역의 역사, 운동에서 시장으로
공정무역의 역사는 6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과 북미에서 엇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흐름으로 나타났다. 초기에 공정무역은 말 그대로 ‘운동’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국제 개발 NGO인 유럽의 옥스팸(Oxfam)이나 미국의 텐사우전드빌리지(Ten Thousands Villages) 등이 제3세계의 여성이나 난민들이 생산한 수공예품을 사들여 소규모로 판매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전문적으로 공정무역을 담당하기 위한 다양한 NGO들이 국가별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영국의 트레이드크래프트(Traidcraft), 독일의 게파(Gepa), 이탈리아의 CTM 등이 대표적이다. 이 단체들은 개발도상국에서 생산한 수공예품과 커피와 설탕과 같은 일부 기호식품 등을 수입하여, 지금으로 치면 홈쇼핑에 해당하는 카탈로그 통신판매나 월드샵(world shop)으로 명명된 전문 상점들을 중심으로 공정무역 ‘운동’을 확산시켜왔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격에 합당한 품질(value for money)을 요구하는 합리적 소비자 운동을 넘어서 ‘소비로 차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발휘하며 새로운 유형의 행동주의의 물결이라 할 수 있는 소위 ‘윤리적 소비자’ 집단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공정무역은 바로 이 집단의 형성과정과 상호공진화 경험을 공유하였다.

이처럼 운동성을 지닌 전문단체들에 의해 주도되던 공정무역 운동은 1990년대 이후 내용과 형식에서 큰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공정무역의 주요 상품이 수공예품에서 커피, 바나나, 초콜렛 등 식품류로 변화된 것이 내용상의 변화라면, 공정무역 상품이 거래되는 방식이 전문단체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틈새시장식 거래방식이 상표(label)와 브랜드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일반시장에도 진입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변화의 초기에는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인 코압그룹(Co-operative group) 등의 진열대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공정무역의 주류화 경향이 강화됨에 따라 최근에는 테스코와 같은 다국적 대형 슈퍼마켓의 진열대, 스타벅스나 네슬레의 상품에서도 공정무역 상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브랜드화와 주류화 전략, 자체진화의 산물인 커피
공정무역의 브랜드화와 주류화를 두고 ‘운동의 변질이다’, ‘공정무역 운동이 시장에 먹혀버렸다’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와는 달리 공정무역의 브랜드화와 주류화는 공정무역 운동단체의 내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수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초기의 공정무역은 판매량과 사회적 파급력에서 말 그대로 틈새시장에 머물며 정체되었다. 한편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인 농산물 가격 하락현상이 심화되면서 개발도상국의 농민과 소작농, 농업 노동자들이 그야말로 기아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원조가 아닌 형태의 지원 방식이 바로 공정무역 시장에의 참여 기회였다.

이런 모색 과정에서 가장 먼저 공정무역 상품으로 자리 잡은 농산물이 바로 커피다. 대규모 플랜테이션 방식의 커피생산이 아닌 소규모 커피 농가들이 협동조합을 재건하는 방식으로 생산의 영역이 조직화되었는데, 이들의 판매망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자체 상표를 부착해서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최초의 공정무역 상표인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가 이런 방식으로 멕시코의 커피농가들과 네덜란드의 공정무역 단체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상표는 유럽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공정무역은 희망무역이 될 수 있을까?
시장을 기반으로 시장의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시장의 대안이 되고자 하는 공정무역의 양가적 속성은 늘 운동과 시장 사이에서 상당한 긴장을 내재하고 있다. FLO의 인증제를 중심으로 공정무역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지만 사실 이 과정에서 제3세계의 소규모 농가들이 인증을 통과할만한 기제를 갖지 못해 공정무역에서 탈각하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기존에 사회정의 원칙에 대해 전혀 실질적 기여를 하지 않았던 다국적 기업들에게도 공정무역 파트너십이 허락되면서 이들이 공정무역을 ‘이미지 세탁’을 위해 활용하면서 그 원칙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한국의 공정무역은 어떤 사정일까? 60여년이 넘어선 서구의 공정무역 역사와 비교할 때,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지만 일부 언론과 일부 생협단체들의 높은 관심 속에 최근 몇 년 사이 규모 면에서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2007년 이후 매년 2배 이상씩 매출액이 신장되고 있는데, 2009년 비공식 통계로 추산했을 때, 여전히 50억 원 정도의 작은 시장이다. 이런 점에서 언론의 주목은 사실 요란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공정무역은 환경과 국제협력에 특화된 운동단체나 생협 조직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즉, 아직까지 공정무역은 시장성의 차원보다는 운동성의 차원에서 접근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공정무역 판매액은 2007년 변곡점을 그리며 크게 성장을 시작했는데, 일부 생협진영이 본격적으로 공정무역에 뛰어들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한국의 생협운동은 80년대 말 이후 도농 간 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농민에게는 보다 나은 가격을, 소비자에게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양질의 상품을 보장하면서 얼굴 있는 거래의 전통을 만들어 왔다. 생협의 입장에서 공정무역은 도시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윤리적 소비 운동이 국경을 넘어 제3세계 생산자와 연대하기 위해 확대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지점이다.

윤리적 소비의 손짓, 당신의 선택은?
최근 한 생협에서 ‘윤소맘(윤리적 소비를 하는 맘)’이란 타이틀을 달고 TV광고가 시작되었다. 생협 ‘운동’이 저래도 되냐며 불편한 반응도 많지만, 전혀 이 운동을 접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호감을 준다는 평가도 상당하다. 윤리적 소비와 공정무역은 또한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애매한 자리에 위치한 ‘사회적인 것’과도 닮아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이중 운동의 발현인 ‘사회적인 것’을 향한 갈망은 구체적인 정치적 기획과 공명할 수도 있지만 더 큰 자본운동의 진폭으로 수렴될 수도 있다.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도 그러하다. 어려운 반세계화 구호 대신 개개인의 일상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자본주의 시장의 꽃인 광고를 통해 손짓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그 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주체가 얼마만큼 운동의 관점을 견지하느냐에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와 사회적인 것을 향한 갈망의 미래가 달려있는 것이다.

필자의 입장을 묻는다면, 한 TV 교양프로그램에서 네팔의 공정무역 활동가가 한 말에 주목하고 싶다고 돌려서 대답을 할까 한다. 그녀는 “공정무역이 최고(best)는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나은(better) 것”이라 말한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가까이 있다고 윤리적 소비가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자 이제 당신의 선택은 어떤 쪽인가?

엄은희
서울대 교육학 박사
(지리학)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